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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내리고!송년회의 계절, 이런 건배사 어때요

중앙선데이 2011.12.03 22:40 247호 14면 지면보기
지난달 10일 한화증권 김종술 홍보팀장은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저녁 회식 모임에 참석했다. 평소 친한 직원들끼리 모여 격의 없이 어울리는 자리였지만 이날만큼은 분위기가 영 살아나지 않았다. 하필 그날 유럽 재정위기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에 주가가 폭락했던 탓이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김 팀장이 건배를 제안했다. “제가 선창할 때마다 여러분은 ‘올리고’와 ‘내리고’를 번갈아 받아주세요.” 곧이어 우렁찬 건배 구호가 울려퍼졌다. “주가는? 올리고! 금리는? 내리고! 월급은? 올리고! 핸디는? 내리고!” 그랬더니 금세 썰렁하던 분위기가 살아났다. 요즘 유행하는 세칭 ‘올리고, 내리고’ 건배사다. 제조업체에선 ‘매출은 올리고… 핸디는 내리고’로 바꾸는 등 직종에 따라 또는 모임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변종이 등장하고 있다. 경기 침체 속에 하루하루 불안한 일상을 이어가는 직장인의 소박한 바람이 축약된 건배사다.

30초 승부, 건배사

최근 서울행정법원 판사들은 체육대회를 마치고 구내 식당에서 뒤풀이를 했다. 이때 등장한 건 이른바 ‘통통통’(通通通) 건배사였다. ‘통∼의사소통! 통∼만사형통! 통∼운수대통! 통통통’. 의사소통만 잘 되면 만사가 술술 풀리고 운수가 절로 터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법원 관계자는 “양승태 신임 대법원장이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한 이래 판사들 모임에서 ‘통통통’ 건배사가 애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비단 법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의 회식에서도 ‘통통통’은 널리 쓰이고 있다. 언제부턴가 소통 부재가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올리고, 내리고’나 ‘통통통’의 예에서 보듯 건배사는 그때 그때의 세태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건배사에 관한 책을 2권 펼쳐낸 스피치 강사 김미경씨는 건배사를 ‘세상에서 가장 짧고 열정적인 폭발력을 가진 말하기’라고 정의했다. ‘30초 안에 승부가 갈리는 리더십’이라고도 표현했다. 아닌 게 아니라 건배사는 모임의 참석자들을 순식간에 하나로 묶어주고 감정의 동화 작용을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고 희망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것도 건배사의 고유 기능이다. 때로는 좌중을 휘어잡고 포복절도하도록 해 분위기를 고양시키기는 역할도 한다.

술의 종류나 술자리의 성격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건배사의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많은 유형은 짧은 삼행시 형식이다. 서두에 예를 든 단어들, 예컨대 오징어(오래오래 징그럽게 어울리자),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중한 사랑을 위하여),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사우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변사또(변치 말고 사랑하자, 또 사랑하자) 등이 삼행시 유형이다. 이 가운데 빅 히트작이랄 수 있는 ‘해당화’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사용해 유명해진 건배사다. 현 회장은 2009년 한 송년회 자리에서 “해당화에는 ‘해가 갈수록 당신과 화목하게’와 ‘해가 갈수록 당신만 보면 화가 나’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다. 여러분과는 ‘해가 갈수록 당신과 화목하게’란 뜻으로 건배사를 외치고 싶다”고 말해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자’는 뜻으로도 쓰인다.

올해 직장인들의 모임에서는 의성어·의태어 건배사나 같은 음절이 반복되는 건배사가 새로운 유행이다. 앞서 예를 든 ‘통통통’ 이외에도 ‘껄껄껄’(좀 더 사랑할 껄, 좀 더 즐길 껄, 좀 더 베풀 껄), ‘싱글벙글(골프는 싱글, 사랑은 벙글)’과 같은 의성어·의태어 건배사가 유행이다. 평소 회식 모임이 잦아 수첩에 건배사 목록을 적어 다닌다는 대기업 홍보담당자 김모씨는 “지난해까지는 보통명사를 많이 쓴 것 같은데 올해는 껄껄껄처럼 같은 말이 반복되는 건배사가 많다”며 “12월 들어 송년회 시즌이 본격화되면 새롭고 기발한 건배사들이 많이 등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세 지긋한 분들끼리의 동창회 모임 같은 곳에선 나이와 관련한 건배사가 등장한다. ‘나이아가라’(나이야 가라)나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 앓고 떠나자)가 대표적이다. 이 구호를 애용하는 60대 중반의 남성은 “‘나이야’를 외치는 선창자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가라’를 우렁차게 합창하면 순식간에 나이를 잊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경영방침을 건배사에 담아 퍼뜨리는 경우도 있다. 올해 직장 단위 모임에서 자주 쓰인 건배사 가운데 하나는 ‘우문현답’이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의 줄임말이다. 기업은행, 대구도시철도공사 등 현장 또는 고객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몇몇 기업에서는 공식 건배사처럼 쓰인다. LS그룹에서는 지난달 26일 구자홍 회장이 그룹 바둑대회 뒤풀이에서 사용한 ‘다미세’로 통일되는 분위기다. ‘다함께 미래로 세계로’란 뜻을 담았다고 한다. 우리은행은 아예 회사 비전을 담은 건배사와 부서별 회식에서 쓸 수 있는 건배사를 모아 '위하여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란 이름의 책자를 발간했다.

다양한 건배사가 쏟아져 나오다 보니 상황별로 적절한 건배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해 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까지 등장했다. 모 주류업체가 만들어 배포 중인 건배사 앱은 사자성어·외국어, 건강·행복, 단합·다짐, 축하·위로 등 네 가지 범주에 맞춰 건배사를 나눴다. 한국거래소에 근무하는 공도현 팀장은 이 앱의 덕을 톡톡히 본 경우다. 오직 외길 ‘위하여’만을 외치던 그는 지난달 중순 까마득한 후배들과의 모임을 주재하게 된 자리에서 슬쩍 스마트폰을 커닝했다. “에스키모어로 건배가 ‘이히히히’랍니다. 자, 다같이 이히히히!” 그러자 선배를 어려워하던 후배들이 밝게 웃으면서 분위기가 일거에 살아났다. 그는 “스마트폰에서 찾은 거라고 했더니 후배들이 더 센스있는 선배로 보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유행을 타는 건배사 말고도 진심이 담긴 자기만의 건배사를 개발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방법도 있다. 널리 알려진 시구절을 차용하거나 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권재진 법무장관은 지난달 중순 한 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건배사를 맡았다. 마침 수상자는 자신의 40년 지기인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부소장이었다. 그는 “잔 하나에 축하와/ 잔 하나에 사랑과/ 잔 하나에 행복과/ 잔 하나에 존경과/ 잔 하나에 건강과 / 잔 하나에 미래, 그리고 꿈/ 이 모든 것을 담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이 모든 것들을 위하여 건배”라고 외쳤다. 만장의 박수가 터졌다. 그의 건배사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개작한 것이었지만 좌중에선 분위기에 어울리는 격조 있는 건배사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어떤 건배사를 선택하느냐는 본인의 자유다. 술자리에선 모든 것이 너그러워지는 법이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자칫 느슨해진 분위기를 틈타 성희롱에 가까운 건배사를 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도 종종 있다. 지난해 만찬 석상에서 꺼낸 ‘오바마’ 건배사로 설화(舌禍)를 입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 경만호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다. ‘오바마’는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란 뜻으로 그 무렵 시중에서 유행하던 건배사였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가장 평범한 건배사 ‘위하여’가 수십 년째 한국인들의 술자리에서 장기집권하고 있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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