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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조선소요 사태 풀기 위해 문치 전환 촉구

중앙선데이 2011.12.03 20:31 247호 26면 지면보기
광화문 비각 앞에서 시위하는 한국인들. 일제는 본토에서 병력을 급파해 맨손 시위대를 잔혹하게 사냥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운동의 시대
⑤ 문관총독 사기극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21년 서울에서 발간된 조선독립소요사론(朝鮮獨立騷擾史論)은 흥미로운 책이다. 복면유생(覆面儒生)이 저자인데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휘호를 써 주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자신을 ‘일본제국의 유생 청류남명(靑柳南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 속에선 3·1운동의 원인을 천도교, 무단정치, 이주 식민정책, 민족자결주의 등 여러 가지로 논하고 있는데, 그중에 ‘은사수작편당론(恩賜授爵偏黨論)’도 들어 있다. 총독부로부터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이 노론에 편중된 것이 시위의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재상(宰相) 이완용은 노론의 거두요, 소론파로는 조중응이 있지만 중요하지 않고, 전부 노론 천하가 되어 소론은 극단으로 압박되었으며 소론에서는 노론에 붙은 조중응을 실절자(失節者:절개를 잃은 자)로 여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합방 이후) 천하의 사업(事業), 미명(美名), 세리(勢利)는 모두 노론이 차지한 것이 3·1운동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노론세가 강했던 충청도에서도 156회의 시위에 연인원 12만여 명이 참가해서 590여 명이 살해당한 사실(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은 크지 않다. 3·1운동은 역사의 객체였던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이 망국 후에도 얼마나 조선총독부와 긴밀하게 지냈는지를 말해주는 산 증언은 될 수 있다. 실제로 노론 당수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1912년 3월 ‘조선 귀족(貴族)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총독부에 붙어 부귀를 누리려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세했다. 이완용은 손병희의 3·1운동 합류 권유를 거부한 데 이어 3·1운동 직후와 4월 9일, 5월 30일 연이어 독립운동을 중지하고 일본 통치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완용도 그만큼 당황했다는 방증이었다.

1 하라 다카시 총리. 일본 정계의 문치파를 대표한다. 1921년 11월 암살되었다. 2 일본 중의원 가와사키 가쓰 의원. 군국주의에 맞서 의회정치를 지키려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4월 들어서도 만세시위는 진정되기는커녕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 18일자에 “함경도 홍원군 보청면 삼호(三湖)에서 수백 명의 아동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변경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당황했다. 매국적(賣國賊)을 제외한 남녀노소 모두가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한국민은 총독부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라던 선전이 사기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급기야 일본 중의원(衆議院)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8일자는 일본헌정회(憲政會) 출신의 대의사(代議士: 의원) 가와사키(川崎克)가 질문서를 제출해 “정부는 왜 이런 중대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는가”라면서 “헌병행정(憲兵行政)의 무능을 유감없이 폭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와사키는 또 “정부는 공안 유지의 필요상 이런 기관들을 쇄신할 의도가 없는가”라면서 조선인들을 공직에 임용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헌병경찰제를 주축으로 하는 무단통치를 시위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조선독립소요사론도 ‘모두가 일시에 발흥해서 소요의 원인을 무단통치의 죄(罪)에 모두 귀결시켰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여전히 무력으로 진압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일본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신보 4월 10일자는 일본 육군성에서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8사단 보병 5연대와 2사단 보병 32연대의 각 대대를 아오모리(靑森)에서 원산으로, 13사단 보병 16연대와 9사단 보병 36연대의 각 대대를 쓰루가(敦賀)에서 부산으로, 10사단 보병 10연대와 5사단 71연대를 우지나(宇品)에서 부산으로 증파하고, 오사카(大阪)에서도 헌병 400명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맨손 시위대에 총칼로 맞서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야만의 제국이었다.

같은 날 하세가와는 세 번째로 협박 유고(諭告)를 발표해 ‘군사를 동원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득이한 조치’라고 강변했다. 하세가와는 4월 17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기자에게 “조선소요 사태의 진정은 조선 주둔 사단과 헌병, 경찰만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래서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군대를 증파시켜 일거에 진압할 방침”이라고 토로했다. 조선 주둔 사단과 헌병, 경찰력만으로는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다.

하세가와는 4월 15일 제령(制令) 제7호를 발포해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고자 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시위는 물론 모의만 해도 징역 10년이라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도쿄아사히신문 기자에게 “조선인의 지위와 경우(境遇:형편)를 존중하고 일시동인주의(一視同仁主義:일본인과 한국인을 같이 바라봄)를 철저하게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앞장섰던 민족 차별주의 정책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월 28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조선병합은 일본 제국의 존립을 확보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지 단순히 조선인의 이익을 위함이라고 교시하는 것은 오히려 해롭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인을 위해서 병합했다’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대소 관리로부터 의사와 보통학교(초등학교)의 훈도(訓導:교사)까지 모두 장검을 차고 시중을 왕래하는데 순박하고 정직한 자라도 어찌 유쾌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통치의 요체는 빨리 무치(武治)를 폐하고 문치(文治)를 함에 있다”고 문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개혁 요점으로 ‘①문관총독제 ②헌병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성적이 불량한 보조헌병제 폐지 ③관리 임용을 식민지 인민을 위해 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나아가 “요컨대 조선을 일본의 부속지(附屬地)라는 관념으로 (통치)하지 말고 전적으로 조선을 주(主)로 하여 수립하라”고 제안했다. 한국인이 원하는 것은 독립이었지만 대안은 기껏 문관총독제였다. 총독 하세가와는 앞의 도쿄아사히신문 기자에게 문관총독론에 대해 “위대한 수완을 가진 문관 대정치가를 기다리는 것은 참 좋을 것이다”라고 애매하게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이 어디 있겠느냐는 뉘앙스였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식 무단통치의 파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만주 안동(安東)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기관지 반도청년보는 6월호에서 “총독 하세가와는 불가불 사직청원을 올렸다”면서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하등 발표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일본 정부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풍자하고 있다. 반도청년보는 하세가와가 시위 발생 직후 사직서를 낸 것처럼 보도했지만 조선총독부 관보 7월 1일자에서 하세가와는 여전히 “조선인은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일본인과 하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통치 또한 일찍부터 동화(同化)의 방침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대의에 준칙하여 편사(偏私:사적으로 편향됨)가 없었다”라는 기만적 언사를 계속했다.

재팬크로니클은 4월 22일자에서 “금번 소요가 무관제도하에서 발생했으므로 그 대신 문관총독을 임명하는 것은 반대할 일이 아니지만, 조선인의 심중에 저들이 원하는 것은 즉시 주어지리라는 사상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경계해 곤혹스러운 일본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계속 침묵을 지키던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는 1919년 8월 19일 일왕(日王)의 명으로 반포되는 칙령(勅令) 386호를 통해 “조선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밝혀 문관도 총독으로 임용할 길을 터놓았다. 또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고 관리 및 교원들의 장검 패용도 폐지시켰다. 원성이 자자했던 무단통치의 상징적 조치들은 조선 민중의 항거로 폐지되었다. 또한 한국인에게만 자행되던 태형(笞刑)도 1920년 4월 1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 1919년 8월 18일자는 ‘조선총독 백작 하세가와와 정무총감 야마가타(山縣伊三<90CE>)를 의원(依願) 면직하고 해군대장 남작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조선총독에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무총감은 법학박사(法學博士)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였다. 앞의 반도청년보에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혈전하기로 맹서한 자라 무관총독이니 문관총독이니 하는 것이 무슨 관계인가”라고 선언한 터인데, 말만 문관총독 운운해놓고 다시 해군대장 출신의 무관총독을 임명한 사기극이었다. 새 무관총독 사이토의 부임 길을 만 예순셋의 청년노인 강우규(姜宇奎)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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