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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첸위, 이혼 통보 받자 “아름다움 극에 달하니 추해지네”

중앙선데이 2011.12.03 20:21 247호 29면 지면보기
예첸위는 무슨 일이건 혼자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생 제자는 많아도 조수는 없었다. 1980년대 초 간위(甘雨) 골목의 사저에서. [김명호 제공]
1940년 봄 항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중이던 다이아이롄(戴愛蓮·대애련)은 중간기착지 홍콩에서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초청을 받았다. 쑹은 다이를 홍콩에 와있던 중국 예술인들에게 일일이 소개했다. 해외에서만 활동하던 다이는 화가 딩충(丁聰·정총), 예첸위(葉淺予·엽천여), 황먀오쯔(黃苗子·황묘자) 등과 어울리며 중국 문화계의 주류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6>

다이아이롄은 큰 물에서 놀던 예술가다웠다. 예첸위를 한눈에 알아봤다. 일주일 만에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2009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난 딩충의 구술에 의하면 항일 의연금 모금을 위해 주룽(九龍) 반도의 한 호텔에서 열린 다이아이롄의 첫 번째 공연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인쇄비를 아끼느라 포스터를 화가 한 사람이 50장씩 직접 그렸다. 관람객들은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미망인 쑹칭링과 중국혁명의 원훈(元勳)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의 무남독녀인 것을 알자 몸 둘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예첸위의 활약이 특히 돋보였다. 무대감독과 복장관리, 조명을 혼자서 다해냈다. 공연기간 내내 예첸위는 십장이었고 우리는 노동자였다.”

공연을 마친 다이아이롄은 예첸위에게 대담한 제의를 했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전쟁으로 고통 받는 조국 동포와 호흡과 운명을 함께하는 게 소원이었다. 나랑 항일성지 옌안(延安)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 저우언라이에게 내 말을 전해라.”

하지만 예첸위의 생각은 달랐다. 연안으로 가기 전에 결혼부터 하자고 하자 다이는 씩 웃으며 눈을 한번 흘겼다.
며칠 후 쑹칭링은 저녁이나 하자며 친지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아이롄과 예첸위의 결혼을 선포하고 저우언라이가 보낸 편지를 다이에게 건넸다. “옌안에 오지 말고 후방에서 항일 선전활동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예첸위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다이아이롄은 중국어를 못한다. 도대체 예첸위가 무슨 재주를 부려 세계적인 무용가를 홀렸는지 모르겠다”며 온갖 농담을 다했다.

다이아이롄의 통역으로 자처하던 에드거 스노(Edger Snow)가 “신부의 말에 의하면 예첸위의 영어 실력이 시골학교 중학생 수준은 된다”고 하자 다들 박장대소했다.
예첸위는 스케치북을 들고 충칭(重慶)·구이린(桂林)·홍콩·티베트·인도·미국을 오가며 다이아이롄의 공연 뒤치다꺼리를 했다. 가는 곳마다 중국인이 추는 외국 무용을 처음 접한다며 관객들의 찬사가 요란했지만 그 뒤에서 후일 “20세기 중국 미술의 정수”라고 해도 손색없을 수천 점의 무용하는 여인과 소수민족의 열기가 화폭에 담기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949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에 입성한 후 처음 열린 ‘전국문학예술계 대표대회’에서 예첸위는 미술가협회 부주석에 선출됐고, 다이아이롄은 신설된 베이징 무용학원 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겨울, 티베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예첸위에게 다이아이롄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그날 밤 예첸위는 “추한 것이 극에 달하면 아름다움이 되고,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추해진다”며 춤추는 여인 옆에서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는 고수(鼓手)의 모습을 그려 다이에게 선물했다. 홍콩에서 처음 만나 2주 후에 결혼한 지 10년 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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