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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향의

중앙일보 2011.11.30 00:03 종합 37면 지면보기
조선에서 의과(醫科)는 중인들이 보는 잡과(雜科)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이 『촌병혹치(村病或治)』와 마진(麻疹:홍역) 치료법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한 것처럼 의학에 밝은 사대부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선비 의사, 즉 유의(儒醫)라고 한다. 사대부들이 의학을 공부한 이유는 효자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자제들이 배우는 『소학(小學)』에는 ‘어버이가 누워계실 때 용렬한 의사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불효’라면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학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이천(程伊川:정자)의 말을 싣고 있다. 그래서 당(唐)나라의 왕발(王勃)이 “사람의 자식은 의학을 알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장안(長安:서안)에서 비방(秘方)으로 유명했던 조원(曹元)을 쫓아다니며 의학을 배웠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사람의 자식이 마땅히 의학을 알아야 하는 변증설(爲人子當學醫辨證說)』에서 “지금 사대부로서 혹 의학서를 읽으면 인심이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병의 증상에 약을 조제해 투약하면 사류(士類)들이 모두 천하게 여긴다”고 전하고 있다. 이규경은 “나라의 습속이 의학에 종사하는 자들의 문벌이 낮고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숭품(崇品:종1품)에 오른 태의관(太醫官:어의 수장)도 대간(臺諫)의 하인들이 낮춰본다”고도 말했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추종하면서도 주자가 편찬한 『소학(小學)』에서 “효자는 의학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은 신분제에 어긋난다고 저버린 것이다. 사대부들이 의학을 천시하면서 그 자리를 향의(鄕醫), 즉 시골의사들이 메웠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향의가 잘못 치료했다(鄕醫誤治)”거나 “향의는 약에 대해 알지 못한다(鄕醫不知藥)”는 식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13년(1672) 9월조는 향의 방태중(方泰重)이 어의가 되어 현종을 치료했고, 숙종 29년(1703) 1월조에도 향의 김자극(金自克)이 정원 외 어의로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향의가 내의원(內醫院) 어의까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탁월한 치료실적 때문이다. 또한 향의를 어의로 발탁할 정도로 최고의료기관 운영에 개방적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구당(灸堂) 김남수옹의 뜸 시술이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다는 헌재의 판결이 나왔다. 경직된 의료법으로 향의의 손발을 묶는 행위야말로 한의학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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