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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 실리 … 자산가들 ‘일거양득’ 나눔의 기술

중앙일보 2011.11.29 03:20 Week& 1면 지면보기
상장 제조업체인 A사 이모(43) 상무의 부친이 지난해 갑자기 사망했다. A사는 이씨 부친이 창업한 회사로, 독자인 이씨가 물려받기로 돼 있었다. 그는 30대에 입사해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아 왔다. 부친의 회사 지분을 이씨와 어머니가 고스란히 물려받으려니 거액의 상속세가 예상됐다. 가진 현금으론 감당이 되지 않았다. 부동산이 있었지만 급히 팔기 힘들었고 모친이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어서 팔고 싶지도 않았다. 법무법인 등에 의뢰해 상속세를 최대한 적게 내며 지분을 가져오는 방안을 연구했다.


‘기부테크’
자산 10억이상 부자 39% “기부하고 싶지만 방법 모른다”

 지분 10%를 성실 공익법인에 기부하자는 솔루션이 나왔다. 일반 공익법인에 대한 주식 기부는 5%까지, 성실 공익법인은 10%까지 증여세가 면제된다. (성실 공익법인은 운용소득의 80% 이상을 직접 공익목적에 쓰고, 외부감사를 받는 등 보다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한다.) 이씨가 물려받을 지분이 작아지므로 상속세도 그만큼 덜 낸다. 다만 A씨는 회사 경영권 위협 가능성은 차단하고 싶었다. 공익법인에 지분을 넘기면 소유권은 주되, 우호세력으로 경영권은 방어할 수 있어 적합했다. 이씨의 상속 컨설팅을 했던 세무사는 “이씨에게 도움이 됐고 결과적으로 공익에도 보탬이 됐다. 특히 이씨 모친이 ‘작고한 남편이 좋아할 것 같다’며 만족해 했다”고 전했다.



 자산가들의 상시 화두는 가업승계 등 증여·상속과 연관된 세금 문제다. 관심은 단 하나, 어떻게 하면 안 내거나 덜 낼 것인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비법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오랜 경험과 노하우에, 최근에는 IT 기술이란 무기까지 고루 갖춘 세무당국에 맞서 개인이 틈새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증여나 상속은 세무당국이 특히 주시하는 분야다. 지금 당장 얼마간을 덜 낸다 해도 몇 년 뒤 결국 추징당할 가능성이 크다.



 발상을 조금만 바꾸면 세금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물려줄 몫을 줄이는 것, 바로 기부다. 그만큼 과세표준이 줄어들고 자연히 내야 할 세금도 적어진다. 절세 외 다른 측면도 있다. 함지원 딜로이트 변호사는 “어차피 낼 세금이라면 국가가 대리 관리하지 않고, 기부를 통해 내 취향과 가치관에 맞게 직접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를 ‘수동적 납세자에서 능동적 납세자가 되는 법’이라고 부른다.



중견기업 오너이자 대표인 김모(62)씨가 그런 경우다. 김씨는 아들에게 물려줄 자산 약 1800억원의 50%를 고스란히 세금으로 내고 싶지 않아 2006년 회계법인에서 ‘가업 승계플랜’ 컨설팅을 받았다. 변호사·회계사들은 ‘현실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했고 대신 ‘세금으로 낼 돈을 마음껏 쓰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평소 세금이 낭비된다는 신문 기사에 분통을 터뜨리곤 하던 김씨였다.



그는 10억원 상당의 회사 주식과 현금 300억원을 털어 모친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어릴적 배고픔을 못이겨 홀로 상경, 맨손으로 사업을 일궜기 때문에 무학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각별한 마음이 있었다. 재단은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최근 김씨는 회사일과 관련해 정부 소관 부처를 찾아갔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가 만든 재단에서 학비를 받았던 대학생이 행정고시를 패스해 이 부처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나 이씨처럼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기는, 보다 현실적인 동기의 ‘버전 2.0’ 자산가 기부가 조금씩 늘고 있다. 중앙일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자산가들의 기부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이 나타난다.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가진 부자 100명의 절반이 ‘지금 기부하고 있다’고 답했다. 여기에는 종교단체에 대한 소액기부 등도 포함된다. 또 ‘지금은 안 하지만 관심이 많다’는 답변도 30%였다. 은행·증권·보험사에서 자산가(금융자산 10억원 이상)들을 상담하는 PB들에게 간접 조사한 결과다.



 하지만 우리나라 세법은 기부문화가 활성화된 미국 등에 비해 기부에 세금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데 엄격하다. 과거 공익재단을 탈세와 편법상속 수단으로 악용한 전례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기부 발표와 관련, 5% 초과 주식 기부에 대한 세금 부과가 사회적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하나은행 PB사업부 김기욱 세무사는 “자산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상속 플랜을 짤 때 기부도 하나의 솔루션으로 넣어 고려한다”며 “다만 개인이 재단을 설립·운영하기엔 절차가 복잡하고, 세제 혜택 받기도 까다로워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반드시 거액 자산가만 이기적인 동기의 기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근로소득자라면 법정기부금이나 정치자금의 경우 근로소득금액 한도 내에서 100%까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본인의 기부가 아니더라도 연 소득이 100만원이 안 되는 배우자나 가족 등이 한 것도 대상이 된다.



 더구나 요즘에는 그야말로 푼돈으로도 할 수 있고, 방법도 매우 쉬운 길이 많다. 인터넷 발달로 세계 사람들이 옆집 친구 처럼 소통할 기회를 가지며 나타난 일이다. 개인 기부금을 자본금으로 개도국 창업자들에게 무이자 소액 대출을 지원하는 키바(Kiva.org)가 대표적인 사례다. 키바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기부와 연결시켰다. 웹에 올라온 사연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이를 지정, 돈을 내므로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불신도 간단히 해결된다. 개도국 창업자가 원금을 갚으면 다시 다른 이에게 빌려주거나 기부한다. 더구나 키바는 기부에서 ‘펀’을 강조, 여가 활용 또는 엔터테인먼트 성격도 부가했다. 다만 지정단체가 아니므로 이곳에 내는 25달러가 소득공제 대상은 아니다.



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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