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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숯가마에서

중앙일보 2011.11.29 00:00 종합 29면 지면보기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숯가마에 들러 몸을 두세 번 푹 삶아보는 일. 심신이 개운해진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주중의 늦저녁. 야외 숲 속 숯가마는 혼자서 청량한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날도 무료함을 달랠 겸 발걸음을 그리로 돌렸다.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 들어서니 여러 아낙네만 둘러앉아 있었다. 미온의 토굴이라 비실비실 흘리는 땀을 훔쳐내며 이들의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조만간 조용해지지 싶었다. 하나 낯선 남자 하나쯤은 안중에도 없는지 아니면 친정에라도 온 듯, 부끄럼을 모르는 저 용감한 아낙네들은 주저리주저리 얘기가 나선형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귀 기울여 들어보겠다는 자세로 마음을 바꿔야 했다.



[일러스트=백두리]


 한 여인네 왈, 자기 시모가 참 영특하고 활달하다는 찬탄이다. 시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다. 40대에 남편과 사별했다. 그간 음식장사를 하며 혼자 4남매를 키웠다. 50대 무렵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 설상가상 그 무렵 장남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크나큰 슬픔이었다. 가슴속에 아직도 그를 묻고 산다. 수년 전엔 둘째 아들이 이혼을 당했단다. 그 며느리가 바람이 나, 도망간 걸로 추정한다. 시모가 가슴 아픈 지난 얘기를 풀어 놓을라치면, 신세 한탄에 눈물범벅이다. 그렇긴 해도 재롱 떠는 손자를 보면 금세 눈물 뚝 그치고 깔깔 웃어댄다. 막내며느리인 그녀가 곁에서 보기에 아직 때묻지 않은 소녀의 모습이다. 시모가 귀엽고 너무 순수해 보인다는 것이다. 불행은 불행대로, 그것 또한 하늘이 주신 거고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렇게 믿고 산다. 살아 ‘있음’에 강한 긍정을 하며 지낸다.



 옆의 다른 아낙은 제 시누이가 참 힘들게 산다고 되뇐다. 일류대학 나오고 외국에 유학 가 박사까지 땄단다. 집안도 넉넉할 뿐 아니라 주위 식구들은 다 잘나갔다. 이혼 후유증 탓도 있지만, 그녀는 늘 시무룩한 표정이다. 아직도 엘리트 의식에 빠져 헤매고 있는지,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 도무지 남을 인정하거나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세상일에 대한 그 똑똑한 비판의 자세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도로만 보인다. 사업 부진에 갑갑해진 그 마음도 결국 자신이 이 ‘사회’에 희생된 탓이라 말한다. 한국 남자들, 여성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는 소리도 잦다(이건 맞는 소리 아닌가?). 하나 덜 배우고 좀 모자란다 싶은 올케가 보기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중·장년 여성들의 삶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보인다. 과거의 드라마를 갖고 어떤 식으로든 솔직한 감정으로 풀어헤치기도 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타입.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안고, 그걸 숨긴 채 그 상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타입의 여성도 있다. 상처를 무시할수록 그 상처는 더 커져서 곪게 돼 있다. 강한 자기애(自己愛)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상처는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또 아픔이 있다는 건 그것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속마음의 깊은 염원의 반영이기도 하다. 여러 번 깊이 살펴봐야 할 일이다. 무슨 자산처럼 여기는 자부심, 자존심 같은 것도 사실은 허영의 하나 아닌가.



 물은 다투지 않고 낮은 데로 흘러 만물을 적시며 기른다는데, 우리의 마음 내려놓기는 왜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인생이 별건가. 이 배움의 학교에서 살다 어느 날 몸을 버리고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이 삶에 무슨 의미 부여로 애를 쓰는 일이 요즘 나로선 무의미하게만 보인다.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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