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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하는 유럽 구원할 ‘새로운 철학자’ 마침내 등장

중앙선데이 2011.11.26 23:47 246호 25면 지면보기
니체는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 말했다. 니체는 좋은 의미에서 ‘철학의 괴물’이었다.
때는 1889년 1월 3일. 장소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이었다. 마부가 말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말의 목을 휘감아 마부가 말을 더 이상 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선 쓰러졌다. 경관 두 명이 달려왔다. 깨어난 니체는 완전히 실성(失性)했다. 일단 예나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34·끝>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쓰러진 니체는 무명에 가까운 전직 대학교수였다. 바야흐로 이름이 알려질 참이었다. 그는 11권이나 되는 책을 출간했으나 팔린 것은 500권 남짓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었던 니체는 평생 두통·복통·안질환에 시달렸다. 건강 때문에 34세에 교수직을 그만둔 니체는 10년째 기후 좋은 곳을 찾아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를 떠돌았다. 고통을 이겨낸 초인적인 의지에서 불멸의 작품이 나왔다.

『선악을 넘어서』 독일어 초판본의 속표지.
자신이 유명해진 줄 모른 광인
니체의 정신이 파멸된 원인은 매독으로 추정된다.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약 니체가 온전히 정신을 보전하고 오래 살며 철학 작업을 계속했다면 세계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니체는 11년을 더 살았다. 그를 돌본 것은 어머니 프란치스카와 여동생 엘리자베트였다.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돼 재가하지 않은 어머니는 니체를 밤낮으로 돌보다 7년 후 사망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니체는 자신을 디오니소스·예수·셰익스피어·카이사르·창조주와 동일시했다. 유럽의 군주들에게는 과대망상 증세가 역력한 서한을 보냈다.
니체가 죽고 14년 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병사들은 니체의 책을 보급받았다. 군용으로 튼튼하게 제본한 15만 부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파우스트성경과 더불어 병사들에게 지급됐다. 무명 철학가 니체가 독일 우파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그가 된 것이다.

니체와 독일 국가의 잘못된 만남은 계속됐다. 니체는 나치스 독일의 사상가가 됐다. 그렇게 만든 것은 동생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오빠를 ‘전시’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을 보러 몰려왔다. 그러나 사망할 무렵의 니체는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엘리자베트는 1935년 사망할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나치스 독일은 국장(國葬)으로 니체교(敎) 최고 여사제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수뇌부는 눈물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엘리자베트는 반유대주의자였던 남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했다. 반유대주의에 반대했던 니체는 푀르스터를 끔찍이 싫어했다. 엘리자베트와 베른하르트는 파라과이에서 벽안(碧眼)·금발 독일인의 누에바헤르마니아(新독일)를 건설하려고 했다. 참담한 실패 끝에 남편은 자살했다.
독일로 귀국한 엘리자베트는 편집자를 고용해 니체의 유고 중에서 반유대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을 짜깁기한 다음 권력의지라는 제목으로 1901년 출간했다. 권력의지는 나치스 독일에 폼 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엘리자베트는 히틀러·무솔리니와 친분을 쌓았다. 히틀러에게는 “당신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이다”라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니체가 제정신으로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사상을 나치스가 납치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사회주의·기독교 등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에 반대했다. 니체는 특히 독일 민족주의에 반대했다. 민족주의를 근대 국가의 붕괴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저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를 사랑한 니체는, 프랑스가 고대 그리스의 진정한 후예라고 주장했고 자신을 폴란드 귀족의 후예로 내세웠다. 전혀 근거가 없었다. 목수·도살업자, 아버지·할아버지를 포함한 20여 명의 루터교 성직자 등 그의 조상들은 독일인이었다.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니체가 1868년부터 숭배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83)와 1876년 결별하는데 바그너의 기독교 성향과 더불어 반유대주의도 한 원인이었다. 한때 둘은 부자지간 같았다. 니체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출생한 바그너는 니체에게 강한 아버지를 느끼게 하는 롤모델이었다.
훗날 철학의 성인으로 숭배될 것 예상

미치기 전에도 니체는 남들이 보면 과도한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선천적이건 노력에 의한 것이건 그는 천재였다. 19세기는 천재의 세기였다. 니체도 그중 하나였다. 니체는 24세에 라이프치히대 박사를 받고 스위스 바젤대 고전 문헌학(文獻學, philology) 교수가 됐다. 프로이트는 역사상 니체만큼 스스로에 대해 철저히 잘 알았던 인간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성찰 결과 니체는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성인으로 취급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구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라고 불렀다. 니체는 쉽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철학자다. 실존주의·해체주의·문화상대주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계보를 캐다 보면 반드시 그가 나온다. 그의 이름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채식주의, 할리우드 영화를 논할 때도 거론된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신(神)의 죽음을 선언했고 여성에게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 신학과 페미니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20, 21세기 철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니체를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들도 있다. 니체를 ‘독일어를 아름답게 구사한 문필가’ 정도로 보는 게 그들의 시각이다. 이런 시각에는 이유가 있다.

니체의 저작에는 문헌 리뷰(literature review)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니체는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니체의 저작에 대해서는 ‘체계적이지 않다’ ‘상호 모순된 내용이 많다’ ‘결론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이 따른다. 니체가 이런 얘기를 듣게 된 것은 그의 글쓰기 스타일, 엄청난 분량의 작품,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으려는’ 그의 의도가 작용했다.

니체가 바라본 유럽의 특징은 쇠미함이었다. 민주주의·민족주의·기독교에는 생명력도 상상력도 없었다. 그는 초인이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봤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에 나온 초인은 선악을 넘어서(1886)에서 ‘새로운 철학자’로 구체화됐다. 출간할 출판사를 찾을 수 없어 자비로 출간한 선악을 넘어서에 대해서도 니체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886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니체는 2000년까지 선악을 넘어서를 금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 철학의 지평을 열 것이라는 게 확실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100년은 걸린다는 판단에서다.

강자의 가치가 건강한 가치
선악을 넘어서는 니체 최고의 저작으로 손꼽힌다. 9개 부분으로 구성된 선악을 넘어서는 그의 저서 중 가장 체계적이다. 니체의 특장인 경구(警句·aphorism)도 살아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새로운 철학자들’의 길을 확보하려는 듯 니체는 과거 철학자들의 편견을 폭로한다. 새로운 철학자도 초인처럼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자신의 충동 욕구를 통제해 새로운 가치체계, 도덕체계의 수립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유럽의 데카당스가 초래하고 있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초인 철학자들이 유념할 게 몇 가지 있다. 가치는 신이나 역사나 이성이 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다. 객관적 가치를 제시하고 보장하는 신(神)이나 철학 체계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의 기독교적 가치는 약자인 노예들이 만든 것이다. 기독교 도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철학의 도덕체계 또한 노예의 도덕체계다. 미래의 철학은 강자인 주인의 가치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강자의 가치는 인간의 삶에 힘을 더하며 삶을 건강하게 한다.

노예의 이익과 이해에 봉사하기 위해 형성된 기독교 가치체계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담론이 중요하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유대교·기독교 신학이 만든 허구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있을 뿐이다. 강한 의지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향인 권력의지와 부합된다. 권력의지는 인간의 생존의지보다 중요하다. 권력은 돈이나 섹스보다 근원적이다. 창의적인 가치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위아래로 뒤집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가치체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새 가치들이 인간의 삶을 전진시킬 수 있느냐 아니냐다. 가치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치를 평가할 때는 가치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를 따져야 한다.

가치체계는 강자가 만드는 것이라는 게 ‘상식적’이다. 니체는 그 반대로 봤다. 그는 가치체계가 강자와 약자 간의 합의나 타협으로 생성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노예의 가치를 주인이 왜곡해 자신의 것으로 삼을 가능성도 중시하지 않았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니체는 츠비박(Zwieback), 아이스크림, 어머니가 보내주는 소시지를 좋아했다. 아버지 카를 니체는 1849년 36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3개월 후에는 동생 요제프가 사망했다. 니체는 자신도 일찍 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자란 니체는 별명이 ‘꼬마 목사’였다. 훗날 그가 기독교 신앙을 떠났지만 니체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그야말로 종교적인 인간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어쨌든 그는 기독교인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바람과 달리 그는 기독교식 장례 후 교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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