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학생 기숙사 통금 철폐 외치다 기존 체제 뒤흔들다

중앙선데이 2011.11.26 23:41 246호 28면 지면보기
프랑스는 평화지향적 문화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혁명과 정변 등 피의 역사가 많다. 이웃 독일인은 기질이 강인하지만 국가 체제엔 잘 순응하고 단결하는 민족성을 보인다. 반면에 프랑스인은 유연하면서도 체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해 정변을 많이 일으켰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제1공화국 탄생, 1799년 나폴레옹의 반동 쿠데타, 1848년 2월혁명과 제2공화국 수립, 1851년 제정 복고 쿠데타, 1871년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사회주의 혁명 파리 코뮌, 그리고 1968년 파리 학생혁명을 들 수 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드골 대통령 하야시킨 68혁명 주동자 다니엘 콘벤디트

68혁명은 프랑스의 정치사상과 사회적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 사태의 여파로 국부로 추앙 받던 샤를 드골 대통령이 하야했다. 또한 이 학생혁명은 인권, 여성의 지위향상, 권위주의 타파, 생활 민주주의, 삶의 질과 환경개선 등을 내세운 신좌파운동 최초의 실력행사였다. 이 유토피아적 사회혁명을 주도한 학생 지도자 중 눈에 띄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당시 독일 유학생 신분이던 ‘빨간 머리’ 유대인 다니엘 콘벤디트(사진)가 68혁명의 핵심 주동자였다.

중학 때 부모 잃고 친척 도움으로 공부
콘벤디트는 45년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서 태어났다. 독일인 변호사 아버지와 프랑스인 고교 교사 어머니 모두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나치를 피해 프랑스에 피란 왔지만 프랑스에 귀화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가족은 독일로 돌아갔다. 중학생 시절 부모를 모두 잃은 콘벤디트는 인척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 부근에서 고교를 다닌 후 65년 자신이 태어난 프랑스로 유학 온다. 먼저 소르본 대학(현 파리 1대학)에서 외국인 학생 특별과정을 거친 후 67년 파리 근교에 위치한 낭테르 대학(현 파리 10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한다.

68년 3월 22일 낭테르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초기엔 여학생 기숙사 출입시간 제한 철폐가 주요 이슈였다. 경찰은 학생 시위를 과잉 진압하고 대학을 봉쇄했다. 반골 기질의 아나키스트며 달변의 선동가였던 콘벤디트는 외국 학생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데모에 앞장섰다. 그는 동료 학생 주동자 몇몇과 함께 5월 3일 소르본 대학으로 시위무대를 옮겼다. 학생 석방, 대학 개혁, 권위주의 타파 등 요구사항도 다양해졌다. 학생시위는 기성세대에 대항한 봉기로 돌변했다. 5월 13일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소르본 대학은 폐쇄됐고 시위대 수백 명이 체포됐다. 그러자 이젠 노동자들이 나섰다. 이들의 연쇄파업과 시위가 6월까지 계속됐다. 기득권에 맞선 모든 계층의 총체적 저항이었다. 알자스계 유대인 교원노조 사무총장 알랭 게마르, 그리고 대학생총연맹 부회장 자크 소바조와 함께 주모자 3인방으로 지목된 콘벤디트는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얼마 후 그는 여자친구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잠입해 학생운동에 계속 참여했지만 다시 경찰에 잡혀 추방됐다. 10년 후인 78년에 가서야 그의 프랑스 입국 금지가 해제됐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간 콘벤디트는 유아원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다 80년대 초 정계에 투신한다. 그는 독일 녹색당에 입당하고 훗날 독일 외무장관이 되는 요슈카 피셔와 각별한 교분을 맺는다. 89년 프랑크푸르트 시 의원에 이어 프랑크푸르트 부시장에 당선된다. 94년부터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한다. 2004년에는 유럽녹색당 대변인을 지냈다. 지금은 유럽 녹색운동 지도자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원전 폐기 등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다.

68 학생혁명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2차 대전 중 대독 항쟁을 이끌었고 전후 제5공화국을 수립해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게 한 근대사의 영웅 드골 대통령은 학생·시민·노동자 시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국민의 신임과 연계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상원 개혁과 지방분권을 골자로 한 이 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그는 69년 4월 28일 지체 없이 권좌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끝난 것을 인식하고 국가 경영을 새로운 세대에게 미련 없이 양보한 것이다. 한편 미국에선 베트남전 반전 시위가 절정을 이뤘다. 체코에선 ‘프라하의 봄’ 사태가 일어나 교조적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했다. 중국엔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학생혁명이 일어난 68년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많은 변혁을 가져온 한 해였다.

균형적 분배, 복지 확대 새 과제 던져
68혁명 초기엔 아무도 이 우발적 시위가 정치·사회·문화적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을 예상치 못했다. 다만 콘벤디트만은 이 학생운동이 수직적 사회 관계의 타파와 욕망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란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오늘날 68혁명과 관련한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그렇지만 한 독일 유대인 유학생의 선동이 결과적으로 프랑스 사회의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사소한 동기에서 출발했던 프랑스 68학생혁명의 유산은 계승·발전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권위주의가 물러나고 있다. 냉전시대를 지배했던 비인간적 공산독재와 불평등한 성장지상형 자본주의도 퇴조했다. 대신 인간의 존엄성 구현이 모든 것에 우선하게 됐다. 부의 균형적 분배와 복지의 확대도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절도 있는 문화전통은 제약 없는 창조적 문화에 자리를 양보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보편적 가치의 대부분은 프랑스 68학생혁명의 산물이기도 했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