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년 바흐 난투극 벌였던 아른슈타트 광장 지금은...

중앙선데이 2011.11.26 23:38 246호 16면 지면보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하면 학창시절 음악실에 걸려 있던 초상화가 떠오른다. 풍성한 가발을 쓴 근엄하게 생긴 아저씨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청소년 시절은있었다.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공부하다가 일찌감치 직업음악인으로 나섰다. 무대는 독일 중부 튀링겐의 조그만 도시들. 깊어가는 가을, 젊은 날의 바흐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Eisenach - 음악가 집안에 ‘샛별’이 뜨다 아이제나흐 성 게오르크 교회 세례반(洗禮盤)에 세 남자가 둘러섰다. 이틀 전 태어난 아들을 안은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 그의 친구이자 이웃 고타시 음악가인 제바스티안 나겔, 궁정 산림관 요한 게오르크 코흐였다. 목사가 세례식을 진행했다. 두 명의 대부중 제바스티안 나겔의 이름을 따 아이의 중간 이름을 지었다. 1685년 3월23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튀링겐의 음악가 집안의 막내로 이름을 올렸다.

젊은 날의 바흐를 찾아서-독일 튀링겐 기행

10월 말 찾아간 게오르크 교회 출입문 위에는 마르틴 루터 찬송가 구절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바흐 칸타타 BWV80번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바스티안의 세례반은 그의 기념탑이 돼 교회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절구처럼 허리가 잘록한 8각형 돌은 시내 곳곳에 붙은 바흐 음악회 포스터의 밑그림으로 쓰였다. 교회 뒤 루터하우스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루터거리다. 이 거리 35번지에 제바스티안이 자란 집이 있었다. 하지만 옛 모습은 없다. 평범한 요즘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이다. 100m쯤 떨어진 곳에 바흐하우스가 있다. 사라지고 없는 생가를 대신해 가까운 곳에 있던 18세기 주택을 1907년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다.

2 아른슈타트 광장의 젊은 바흐. 베른트 괴벨이 1985년 탄생 300년 기념으로 제작했다. 3 아이제나흐 성 게오르크 교회의 세례반 4 ‘오르트루프의 바흐’. 후배 베토벤의 찬사가 새겨져 있다. 5 아른슈타트의 바흐 교회 6 바흐의 결혼등록부를 보여주는 도른하임 교회의 안내인
바흐하우스는 생각보다 멋지다. 바흐 시대의 악기로 연주해 주는 것이 특히 좋다. 박물관 연주자 마이스너가 옛 건반악기를 차례로 연주한다. 챙챙거리는 스피넷으로 연주하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첫 곡, 음량이 작아 쟁쟁거리는 클라비코드로 치는 전주곡 한 소절. 눈만 감으면 18세기다. Ohrdruf - 열 살 소년, 고아가 되다제바스티안의 행복한 시절은 짧았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엔 아버지마저 따라갔다. 열 살은 부모가 죽었다고 마음껏 울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먹구름 같은 불안감만 맘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고아가 된 제바스티안은 세 살 위의 형 야코프와 함께 이웃 오르트루프시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큰형 크리스토프의 집으로 갔다. 형은 신혼이었다.

오르트루프역은 커다란 목골(木骨)집이다. 목재로 골격을 세우고 돌과 흙, 마른 풀로 벽체를 채운 독일 전통건축이다. 열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았으나 혼자 근무하는 직원은 “없다”고 한다. 역에 화장실이 없다니, 이렇게 큰 건물에. 더구나 독일 국철의 역사(驛舍) 아닌가. 동독의 퇴락한 유산은 곳곳에 흉가처럼 남아 있다. 17세기 후반 오르트루프의 인구는 2500명 정도였다. 현재도 5000명 남짓. 그러니 인적이 드물다. 약수를 뜨러 가는지 물통을 하나씩 든 주부들이 폴크스바겐을 타고 떠나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거리’는 다시 조용해진다. 거리 끝에 크리스토프가 일했던 미하엘 교회가 있다. 시의 제 1 교회였으니 규모가 컸겠지만 화재와 전쟁으로 지금은 첨탑만 남아 있다.

7 오르트루프 성 미하엘 교회 첨탑(왼쪽)과 영주의 성
교회 뜰에 ‘오르트루프의 바흐’라는 제목의 아담
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머리는 교회, 몸통은 파이프 오르간인 바흐가 황금색 창을 들고 있다. 허리에는 후배 베토벤의 그 유명한 찬사가 새겨져 있다. “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Bach’는 ‘시냇물’이라는 뜻이다. Arnstadt - 오르간 연주자로 첫발 내딛다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 눈부시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들판이 녹색 융단이다. 이곳 작물은 래디시(빨간 무)다. 새벽에 흰서리가 내려앉았지만 햇살이 번지자 서리는 나무 그림자에만 남았다. 열다섯 살 제바스티안은 튀링겐을 떠나 독일 북부 뤼네부르크에서 유학했다. 조카들이 태어나고 형의 수입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소년은 명문 미하엘 학교에서 합창 장학생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가까운 함부르크를 오가며 오르간 거장들로부터 영향도 많이 받았다. 3년 뒤 부쩍 성장한 바흐는 튀링겐으로 돌아왔다. 아른슈타트 노이에 교회 오르가니스트 자리가 그를 기다렸다. 첫 직장이었다.

아른슈타트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좁은 수로가 도심을 헤집고 다닌다. 구도심 언덕 위의 노이에 교회는 이제 바흐 교회라 불린다. ‘바흐가 1703년부터 1707년까지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는 안내판을 입구에 붙여 놓았다. 교회 안에서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 혹시 연주회라도 열리는가 싶었지만 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안내 여성은 이 교회의 오르간 연주를 녹음한 CD를 틀었으며 오르간은 바흐 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이지만 많은 부품이 교체됐다고 설명해 준다. 그래도 감회가 깊다. 바흐의 교회에서 바흐의 오르간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그녀에게 ‘토카타와 푸가 BWV565’를 큰 음량으로 부탁하니 기꺼이 그렇게 한다. 가을 햇살이 환하게 비쳐 드는 회중석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익숙한 토카타 선율이 천둥처럼 머리 위로 쏟아진다.

교회 앞 광장의 바흐 동상은 명물이다. 조각가 베른트 괴벨이 1985년 제작했다. 탄생 300년 기념물이다. 처음 보면 당황한다. 기억 속에 각인된, 두꺼운 가발에 퉁퉁한 얼굴의 바흐가 아니기 때문이다.외투를 깔고 앉은 청년은 비스듬히 눕듯 몸을 뒤로 젖히고 있다. 도발적인 자세다. 동상은 자부심 넘치는 천재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자의식 강한 바흐는 시 당국과 갈등을 빚었고 교회 일도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이 광장에서 가이어스바흐라는 청년과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바흐의 지휘를 받는 바순 연주자였는데 나이는 세 살이나 많았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바흐는 아른슈타트를 떠날 마음을 굳힌다.

Dornheim - 시골교회서 화촉 밝히다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시장 펠트하우스의 집에 산 적이 있다. 그곳에는 역시 고아였던 육촌 마리아 바바라가 같이 살았다. 고아끼리 서로 의지하다 사랑이 싹튼 건 아닐까. 바흐가 뮐하우젠으로 옮긴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도른하임이었다. 스물두 살 되던 1707년 가을이었다.도른하임은 아른슈타트에서 2.5㎞ 떨어진 조그만 마을이다. 천천히 걸어서 가기로 한다. 손바닥만 한 도심을 벗어나니 툭 터진 전원이 펼쳐진다. 경작지는 깨끗하게 정돈돼 비어 있고 땅의 경계를 이루는 황톳길에는 아름드리 포플러가 노랗게 물들고 있다. 신랑과 신부, 많은 친지도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바르톨로메우스 교회는 작은 시골 교회다. 뜰에 들어서니 노인이 앞장서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안내를 원하는지 따위는 묻지도 않는다. 실내는 ‘바흐 결혼기념관’처럼 꾸며 놓았다. 제단 앞에 두 개의 방석
이 놓여 있다. 노인이 숙달된 설명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목사를 향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리아가 오른쪽, 바흐가 왼쪽이죠. 다음엔 오른쪽 저 제단화를 향해 손을 모으고 서약을 했습니다.” 노인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니 땡땡 종소리가 울린다. “식을 마치고 신랑이 이렇게 줄을 당겨 종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오르간 연주가 이어졌죠.” 다시 버튼을 누르니 바흐의 오르간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울린다. 물론 CD다.

바흐와 바바라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날짜와 장소 외에는 전해지는 내용이 없다. 학자들도 참석자와 축하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에 대해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이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결혼의 전 과정을 복원해 낸다. 이 교회는 10여 년 전만 해도 일부러 찾아와도 문이 잠겨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젠 찾는 이가 제법 많아진 모양이다. 노인의 안내는 헌금 내는 순서까지 이어진다.

Mühlhausen - 거장으로 발돋움하다
뮐하우젠에서 바흐는 1년 머물렀다. 짧았지만 바흐의 뮐하우젠 기간은 의미가 작지 않다. 1708년 도시를 위해 짓고 마리아 교회에서 연주한 칸타타 BWV71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은 방대하고도 완전한 다악장 칸타타다. 그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다.바흐가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던 블라지우스 교회에 그때의 바흐가 당당하게 서 있다. 조각가 메서슈미트가 2009년에 세웠다. 작가는 새신랑의 모습을 빚어냈다. 미소 짓는 얼굴과 물결치는 머릿결이 아름답다. 아른슈타트 광장의 고뇌에 찬 젊은이의 모습은 간 데없다. 양 손도 시선을 끈다. 손가락을 곧게 펴서 아래를 향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건반악기 대가를 묘사하고 싶었을까.

바흐의 왼쪽 발은 계단 한 칸 위를 밟고 있다. 작가는 ‘거장으로의 첫발’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바흐의 음악에 밝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쾨텐 궁정으로 옮겨간 바흐는 무반주 첼로모음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냈고, 최후의 일터 라이프치히에서는 마태수난곡 등 수백 곡의 교회 음악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그 바탕은 20대 초반에 이렇게 시작됐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