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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조각,피카소 드로잉,조선 달항아리...그들을 ‘대화’하게 하다

중앙선데이 2011.11.26 21:40 246호 8면 지면보기
1 아니슈 카포의 1990년대 조각과 루치아노 폰타나의 1970년대 브론즈.
악셀 베르보르트의 직함은 다양하다. 앤티크 유물 딜러이자 미술품 컬렉터, 건축가이자 문화재 전문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여기에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성공 이후 세계적인 큐레이터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그가 살고 있는 ‘그라벤베젤(Gravenwezel) 캐슬’은 앤트워프에서도 30분가량 가야 하는 작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1984년부터 가족과 살고 있는 이 집은 각각 16세기와 18세기에 지어진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지윤의 세계의 컬렉터 <5> 벨기에의 문화창조자 악셀 베르보르트의 城을 가다

2 스튜디오 ‘카날’의 메인 라운지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한국의 달항아리가 있다. 그 옆에서 악셀 베르보르트가 포즈를 취했다. 가든에서 가져온 나뭇가지를 이용한 인테리어 장식도 그만의 방법이다. 3 일본 구타이 작가인 가주오 시라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카날 사무실 모습.
그의 성에는 방이 50개나 됐다. 특이한 것은 모든 방이 각기 다른 인테리어로 디자인됐다는 점. 게다가 방 하나하나마다 모두 주요한 유물 혹은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들이 차지하고 앉아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로마시대 유리병과 중세시대의 예수님 나무조각, 잉카 문명 시절의 조각들이 한 방 안에서 매우 복잡하게, 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상태로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앤트워프대학에서 이집트학으로 고고학 박사를 받았다는 젊은 연구자 쿠엔은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양한 시대를 공부한 미술사학자 십여 명이 이곳에서 함께 연구를 하며 인테리어를 완성합니다. 단지 중요한 과거의 시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에서 시작해 현대와의 소통을 추구하는, 창의적인 연구지요. 컬렉션은 너무 다양해서,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보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르보르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무엇을 담고 싶은 걸까. 인터뷰가 시작됐다.

“나는 앤티크와 현대미술의 조화를 가장 중요시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명에서 나온 예술품들이 ‘대화(dialogue)’하게 만드는 것은 거의 새로운 ‘창조적 문명(civilization)’을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품들은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닌, 일상 생활 공간에서 쓰이고 소통되어야 합니다.”그는 중세 문화에서 나온 많은 파편과 18세기 영국의 앤티크 가구들, 중국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도자기, 그리고 한국의 약주병, 옹기도 좋아한다. 특히한국의 달항아리는 최고라고도 했다. 실제로 그의 스튜디오 메인 라운지에는 달항아리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 베르보르트의 컬렉션.5 카날 오피스에서 이지윤 대표와 인터뷰하고 있는 악셀 베르보르트.6 베르보르트의 캐슬에 있는 공간 와비(wabi).
이러한 컬렉션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이를 활용해 새로운 가구 및 인테리어 소품들을 직접 스튜디오를 통해 생산해 낸다.가장 이채로웠던 컬렉션은 1960~70년대 유럽을 풍미한 제로 그룹(Zero·57년부터 시작된 현대미술 작가 그룹)과 일본 구타이(50~60년대 일본의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작가 그룹) 작가들의 작품이다. 귄터 우커(Günther Uecker)를 비롯해 루치아노 폰타나(Luciano Fontna), 이브 클라인(Eve Klein), 피에르 만조니(Pierre Manzoni), 타피에스(Tapies), 그리고 일본 작가 시라게 등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70년대에 태국·베트남·일본 등 아시아 국가를 처음 방문하면서 동양의 미술과 문화에 흐르는 본질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연히 만난 앤트워프 출
신의 화가이자 제로 그룹 멤버인 예프 베르헤얀(Jef Verheyen)은 내게 새로운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죠. 특히 ‘공(空·void)’의 개념을 가르쳐주었지요. 즉 서양에서 ‘빈 공간’이 동양에서는 ‘가득 채워진 공간 상태’라는 모순적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베르보르트의 컬렉션이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가 단지 현대미술 작품이나 고대 유물을 수집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해오던 앤티크 딜러 및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가미해 새로운 ‘예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예술 공간은 물건을 파는 상점과는 달라야 한다고 스무 살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의미도, 맥락도 주지 않는 환경에서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또 개인적으로 아시아에 대한 발견은 서양 미술에 익숙한 나에게 매우 큰 연감의 창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함께 소통하고 또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역시 함께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예술과 삶의 철학을 친구들과 나눈다는 개념으로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삶의 공간이자, 일종의 쇼룸이다. 세계적인 기업인과 파워 컬렉터의 하우스 인테리어와 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예술 공간’을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간다고 했다.“컬렉션과 함께 사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클라이언트는 인생의 친구입니다. 내 생각이나 디자인을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닌, 함께 새로운 문화를 이야기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내죠. 그래서 사업은 단지 이윤을 남기는 것만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연구하고 나누며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여정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베르보르트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방 중 하나는 다락을 개조해 만든 와비(wabi)다. 와비는 ‘질박한 미의식’이라는 뜻의 일본어로 황토방처럼 흑으로 벽을 만들고 바닥을 올린 좌식 생활공간이다. 사실 아시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 공간은, 유럽의 고성 안에서 베르보르트만의 능숙함과 어우러져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이 공간의 개념을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이라고 규정했다. 천연 소재의 고상함과 우아함(elegance), 장식적이지 않으면서도 귀족적인(nobility), 전통 안에서의 영원성(timelessness)이라고 덧붙였다. 루치아노 폰타나가 말년에 만든 브론즈는 그 분위기에 썩 잘 어울렸다.

그는 99년 사업을 확장하면서 근처 운하 지역에 있던 시멘트, 벽돌 공장을 구입하고 ‘카날(Kanaal)’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회사이자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해 왔다.최근에는 새로운 일을 벌였다. 이름하여 ‘빌리지 만들기’ 프로젝트다. 사무실 뒤쪽에 위치한 공장들을 개조해 새로운 개념의 타운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또 세계적인 작가 아니슈 카포의 대형 작품을 소장하는 상당히 근사한 미술관 설립을 통해 모든 시각적인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마을’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의 일개 작은 도시에 전 세계 컬렉터와 미술 관계자를 끌어들일 만한 ‘볼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유물에서 시작된 관심이 국제적인 컬렉션을 만들고, 시공을 초월한 작품이 어우러지는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집을 만들고, 이제 커다란 빌리지를 디자인하기에 이르렀다. 비전을 제시한 한 사람의 창의성과 새로운 안목이 벨기에 지방의 어느 구석에서 세상의 문화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악셀 베르보르트
악셀 베르보르트는 14살 때 어머니에 의해 유럽의 고성과 저택을 보수하는 전문가(restorer)의 길로 들어섰다. 21살 때 초현실주의 작가인 마그리트의 작품을 구입한 컬렉터이기도 하다. 16세기 르네상스 저택을 사서 복원하는 앤티크 딜러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24살 때였다. 그 이후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활동의 폭을 넓혔다. 82년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앤티크 비엔날레’에서 중국 명시대의 해치 컬렉션(Hatchi collection) 청화백자를 로코코 캐비닛에 디스플레이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Artempo(시간의 미술)’라는 제목의 전시가 포트니 미술관(Museo Fortuny)에서 소개된 이후 세계적인 큐레이터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2008년부터 베르보르트 재단도 운영하고 있다.


이지윤씨는 런던에서 미술사와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연세대 경영대 겸임교수로 ‘창조산업과 예술경영’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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