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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데뷔 55년, 연기도 영화 밖 삶도 바쁜 ‘국민배우’ … 안성기

중앙일보 2011.11.26 01:30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충무로에서 떠도는 이 배우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을 듣다 보면 영어의 ‘too good to be true’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진짜라고 믿기엔 너무나 훌륭하다는 얘기다. 밥 먹던 식당에 후배들이 오면 슬쩍 밥값을 내주고 가는 건 너무 흔해서 미담(美談)에도 못 낀다.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사람을 만날 때도 빠듯한 영화제 예산을 걱정해 사비(私費)로 밥을 사고 술을 산다. 옆 사람이 떨어뜨린 젓가락을 번개같이(!) 주워 주는 건 거의 본능적이다.


“나도 연락 끊고 ‘잠수’ 타보고 싶다 ”
데뷔 55년 국민배우 안성기 … “그래도 일탈은 영화에서나 하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 행복했으면 … ”
“배우 이전에 사람이란 걸 잊지 않겠습니다 ”

 그런데 그 배려심이 평등정신에 입각하니 ‘가식’이라고 의심을 품기도 멋쩍다. 임권택 감독 같은 원로에게만 깍듯한 게 아니라 촬영장 막내 스태프, 인터뷰 일정을 챙기는 홍보담당자한테도 그는 따뜻하다. 자신을 어려워할까 봐 먼저 너스레를 떨어 후배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건 기본이다. 시쳇말로 이런 게 ‘짬밥’의 힘인가 보다. 촬영장 한구석, 여배우 옷가방 안에서 잠들던 다섯 살부터 연기를 했던 배우. 1980년대를 거치며 ‘시대의 얼굴’이 됐고, 지금처럼 ‘국민’이란 수식어가 인플레를 겪기 훨씬 전부터 ‘국민배우’의 영예를 누려 왔던 배우. ‘걸어다니는 한국영화사’라는 형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배우. 아마도 그런 수식어가 주는 부담감을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차곡차곡 내재화했을 성싶은 배우. 올해로 데뷔 55년째를 맞는 배우 안성기(59)를 16일 만났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인 탓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 짐작됨에도, 본전 못 건질 인터뷰를 자청했다. ‘전설급’ 됨됨이를 엿보고 싶은 욕심이 9, 혹시 가능하다면 태클을 걸어보고 싶은 다소 심술궂은 마음 1 때문이었다. 마침 괜찮은 구실도 있었다. 책이었다. 올 초 일본 이와나미(岩波)문고에서 출간된 『안성기-한국 국민배우의 초상』이 최근 국내에도 번역됐다.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권남희 옮김)라는 제목이다. 교토에서 한국어학원 ‘녹두교실’을 운영하는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58)가 쓴 책이다.



 그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을 보고 ‘날카로운 눈빛의 감독’을 연기한 안성기에게 반해 출연작 50여 편을 찾아 본 열성 관객이다. 처음엔 영화에 반했지만 나중엔 ‘인간 안성기’에게 더 빠져들었단다. 한류의 수혜를 입지 않고도, 일본인이 책을 낼 정도로 단단한 위치에 있는 한국의 배우가 몇 명이나 될까. 인터뷰는 이런 찬탄에서 출발했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일본에서 이런 책이 먼저 나왔다는 게 의왼데요.



 “3년 전쯤인가 저한테 평전을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무라야마씨는 제가 94년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했을 때 통역을 했어요. 그때 심사위원장이 로저 코먼(‘B급영화의 제왕’으로 불린 미국 감독)이었고, 잔 모로(‘쥘과 짐’‘연인들’에 출연한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가 같이 심사를 했죠. 쟁쟁한 인물들과 같이 심사하게 돼 저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선 왜 평전이나 배우론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을까요.



 “인터뷰해서 책을 내자는 시도는 몇 번 있었어요. 제가 좀 소극적이어서 흐지부지됐죠. 무라야마씨는 자기가 자료 조사해서 쓰겠다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웃음) 작년엔 절 인터뷰하러 한국에도 왔었죠. 영상자료원, 국립중앙도서관, 헌 책방 등에 다니면서 발품을 정말 많이 팔았더군요. ‘이 영화는 필름을 어떻게 구해서 봤지?’ 싶은 작품도 있고. 제 데뷔작 ‘황혼열차’(1957)가 춘원 이광수의 『애욕의 피안』을 원작으로 했다는 건 국내 자료엔 없는 내용이에요.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는 제목은…음, 이거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급이네요. 청춘이어도 좋고, 청춘이 아니라도 상관없고. 좋네.(웃음)”



●왜 소극적이었나요.



 “워낙 알려질 대로 알려진 얘기를 처음부터 또 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엄두가 안 났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하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오래 연기를 하면서 스캔들 한 번 없었죠.



 “애늙은이처럼 일찌감치 철이 들었던 이유가 크죠. 젊음이 실패를 두려워하면 안 되는데 전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 또 조심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영욕이 교차하는 이 바닥 생리를 어렸을 적부터 생생하게 봐서 그랬을 거예요. 60년대가 한국영화 전성기였는데 그때 영화배우들이 좀 멋있었어요? 애초에 난 외모를 보나 뭘 보나 그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현장에, 연기에 집중하자고 다짐했죠.”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이 주는 스트레스가 여간 심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일탈과는 아예 연을 끊자고 맘을 먹으면 속이 편해요. 미련도 없고. 일탈은 영화 속에서 하는 거라고 정했죠.”



●지금까지 살면서 일탈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 적은요.



 “저도 신호위반은 몇 번 했어요.(웃음)”



 가정교육과 타고난 품성. 모범배우, 모범가장을 이룬 배경이다. “부모님 가르침이 컸죠. 영화기획자였던 아버지는 참 가정적인 분이었어요. 일이 끝나면 주로 집에 계셨죠. 어머니는 이웃이 어려우면 같이 마음 아파하던 분이고요. 그분들 보면서 느끼고 배운 거죠. 청소년기에 인격이 형성된다고 하잖아요. 그때를 잘못 보내면 평생 갈 인격이 흐트러지죠. 제 아이들한테도 착한 게 최고다, 겸손하라고 가르쳐요. 누굴 밟고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게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유명하고 반듯한 아버지 때문에 부담을 느낄 것 같은데요.



 “목사나 교사 자녀들이 힘들다잖아요. 전 제가 우직하게 가고 있으니 아이들은 살짝 옆으로 가도 될 것 같아요. 자기 세계를 찾아야지, ‘리틀 안성기’가 되면 안 되죠. 첫째(다빈·23)는 뉴욕 프렛 인스티튜트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고, 둘째(필립·20)는 시카고 인스티튜트에서 사진 공부를 해요. 그러고 보니 다 예술이네.(웃음)”



 “배려와 이타심은 머리로 생각한다고 가질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본성은 언젠가는 나오죠. 가정교육 덕도 있지만,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았던 게 커요. 저와 제 영화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 몇 명이 좀 귀찮게 한다고 싫어할 수가 있겠어요? 배우 이전에 사람이란 걸 잊지 않으려 했어요. 연예인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착각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기가 허망하다는 걸 잊으면 오만해지거나 중심을 잃기 쉽죠. 무엇보다 전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타인의 행복과 공생(共生)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경우가 출연료 문제다. 그는 97년 후배 박중훈과 함께 “주연배우 개런티가 과다하게 부풀려져 있다. 제작 실정에 맞게 출연료를 받겠다”고 선언해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누군 허덕이는데 나 혼자 잘 살겠다고 하긴 힘들었어요. 물론 그러면서도 ‘좀 더 주면 좋지’ 하는 생각은 했죠.(웃음)”



 이러니 그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일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직함이 많은 것도 증거다. “1년에 2∼3번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곳만 20여 군데”라고 한다. 신영균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 굿다운로더캠페인 공동집행위원장,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 집행위원. 게다가 내년이면 맡은 지 20년이 되는 유니세프 친선대사까지, 이 국민배우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한둘이 아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니 힘들진 않나요.



 “힘들죠. 전화 끊고나서 늘 ‘안 한다고 할 걸’ 한숨을 쉬어요. 작품은 맘에 안 들면 딱 잘라서 거절하면 되는데, 다른 건 안 돼요. 내가 싫다고 하면 저 사람이 실망할 텐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드니까요. 경조사도 그래요. 당사자 얼굴이 떠오르면서 내가 가면 좋아할 텐데, 위로가 될 텐데 싶으니 웬만하면 가죠. 대신 주례는 안 서기로 원칙을 정했어요.”



●시간을 많이 뺏길 것 같은데요.



 “예전엔 힘들고 속상했죠. 배우로서 지장을 많이 받고 있구나 싶으니까. 젊을 땐 촬영 전날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뛰지도 않고 빨리 걷지도 않았어요. 겹치기 출연을 안 했던 까닭도 작품에만 몰두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연기할 땐 철학자처럼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그런 시간을 갖고 관객을 만났을 때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만났을 때 관객들이 받는 느낌은 분명 다를 거예요. 이젠 포화상태가 되니까 다른 일 더 하고 싶어도 못해요. 어느 날 갑자기 연락 끊고 ‘잠수’ 타보는 게 꿈이에요. 이를테면 용평스키장에 갔는데 폭설이 내려서 눈이 2m쯤 쌓여서 고립되는 거.(웃음)”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은 연기 외에 뭔가요.



“영화와 관련된 일은 다 의미 있어요. 신영균문화예술재단만 해도 그래요. 장애인 영화캠프나 장학사업처럼 취지가 좋은 일이 많거든요. 유니세프도 마찬가지고요. 전 이제 유니세프 직원이에요.(웃음) 제가 봉사하는 게 아니에요. 얻어오는 게 정말 커요. 해외여행 가면 그 나라 제일 좋은 데만 가잖아요. 봉사 가면 그 나라에서 가장 못살고 어려운 데를 봐요. 거기서 내가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나 느끼고 자극받고 감사하게 되죠. 돈 주고도 못 살 깨달음이죠.”



●제일 꺼리는 부탁은요.



 “강연과 원고청탁이에요. 강연 일정이 잡히면 한 달 전부터 뒷골이 땅겨요. 대규모,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연기야말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일인데요.



 “그건 제가 아니거든요. 제가 아니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배우는 색깔이 좀 없어야 돼요. 평소에 너무 강렬하면 영화 속에서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아역 출연작만 50여 편 … “안성기 못 데리고 가면 죽은 목숨”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양 볼에 살이 알맞게 오르고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김기영 감독) 다섯 살 소년 안성기의 연기 입문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 안화영은 서울대를 나와 동성고 교사로 재직하다 영화기획자로 활동했다. 같은 대학 의대 출신인 김기영(1919∼98) 감독이 친구였다. 다섯 번째 작품 ‘황혼열차’(1957)에 나올 아역을 찾는다는 친구의 얘기에 안화영은 아들을 데려왔다. 김지미의 동생인 고아 역이었다. 안성기는 김 감독의 전설적 작품 ‘하녀’(1960)에서도 김진규·주증녀 부부의 아들로 깜찍한 모습을 뽐냈다. 59년 ‘십대의 반항’으로 연기상을 휩쓸면서 그는 충무로의 ‘천재 소년’으로 불리게 된다.



 천재 소년은 68년 ‘젊은 느티나무’로 아역 시절을 마칠 때까지 11년간 50여 편에 출연한다. 1년에 4, 5편씩 찍은 셈이다. 성인이 돼서는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는 게 신조였지만 어릴 땐 달랐다. “학교에 있어도 마음이 항상 조마조마했다. 영화 관계자 아저씨가 느닷없이 학교로 찾아와 호출하는 경우가 많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강대진 감독의 ‘어부들’(1961)을 찍을 땐 속초 지방촬영이 길어지자 다른 영화사 제작부장이 찾아왔다. 그가 ‘어부들’ 제작부장과 만나 상 위에 칼을 꽂으며 “날 죽여. 어차피 쟤(안성기) 못 데리고 가면 난 죽은 목숨이야”라고 말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안성기는 스스로 “국민배우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아마 회사원이 됐을지 모른다.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졸업한 그는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 해방세력의 승리로 좌절된다. 결국 운명처럼 충무로로 발길을 돌렸고, 77년 ‘병사와 아가씨들’로 제2의 데뷔를 한다. 80년대엔 ‘바람 불어 좋은 날’‘만다라’‘적도의 꽃’‘고래사냥’‘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칠수와 만수’ 등 숱한 히트작들을 통해 시대를 대변했다. 90년대엔 ‘남부군’‘하얀 전쟁’‘투캅스’‘남자는 괴로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함께했다. 2000년대에도 ‘취화선’‘실미도’‘피아노 치는 대통령’‘형사’‘화려한 휴가’‘라디오 스타’ ‘페어 러브’ 등으로 자리를 지켰다. 최근엔 김명민이 마라톤 선수로 나오는 ‘페이스 메이커’에서 감독 역할을 맡아 촬영을 마쳤다. 석궁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정지영 감독)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안성기 하면 떠오르는 감독이 임권택·정지영·이장호·배창호·강우석·이명세 등이라면, 배우로는 단연 박중훈이다. ‘칠수와 만수’(1988)-투캅스(1993)-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라디오 스타(2006)까지 시대별로 5∼7년 간격으로 히트작을 생산한 보기 드문 콤비다. 인간적으로도 서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내는 선후배지간. 내년께면 다시 ‘안-박 투톱 시스템’이 가동될 법도 하다. “예전에 중훈이랑 투캅스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투캅스4 파이널’을 하자는 얘기를 한 적 있어요. 뭐가 됐든 같이 또 하지 않을까요? 머리 정말 좋은 사람이 기획할 것 같은데….(웃음)”



What Matters Most?



‘라디오 스타’에 함께 출연한 최정윤·박중훈과 이준익 감독.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변함없음, 한결같음이죠. 제일 싫어하는 말이 ‘사람 변했다’는 거예요. 내가 변한 걸 남이 느끼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 변한 모습을 내가 보는 것도 싫어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초심(初心)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관성적으로 연기한다? 용납이 안 돼요. 처음의 마음이 변했다는 뜻이니까요. 상식적인 수준을 넘는 연기, 깊이 있는 연기를 하려고 늘 애쓰죠. 살다 보면 이런 마음이 엷어지는 순간이 오곤 해요. 그래도 이런 마음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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