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 Story] ‘타이타닉’ ‘인셉션’ ‘J. 에드가’ … 이젠 이마에 주름 파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중앙일보 2011.11.19 01:30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사실 우리는 그를 떡잎부터 알아봤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골격도 야리야리하던 소년 시절부터 그는 싹수가 달랐다. ‘디스 보이즈 라이프’에서 당돌한 반항아 연기를 할 때도,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정신지체아로 열연할 때도 그랬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할리우드의 미래였다. 여심을 흔드는 미소년의 대표 주자였던 적도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타이타닉’의 잭으로 그는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소녀 팬들의 우상도 됐었다.


“ 난 비밀스러운 캐릭터에 끌린다 ”
“전설적 FBI 국장 연기했다…대학수업 듣는 만큼 연구했다 ”

LA 중앙일보=이경민 기자





하지만 동시에 그는 ‘토탈 이클립스’에서 시인 랭보에 도전했고, ‘바스켓볼 다이어리’에서 불안한 청춘을 연기했다. 그러더니 이내 스스로를 또 한번 채찍질했다. 그래서 ‘갱스 오브 뉴욕’ ‘캐치 미 이프 유 캔’ ‘에비에이터’ ‘디파티드’ ‘인셉션’을 거치며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명감독들의 페르소나가 됐다. 그사이 꽃미남의 얼굴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불룩한 뱃살도 생겼고 미간에 파인 주름도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망가진 게 아니다. 그저 더 좋은 배우가 돼 가고 있을 뿐.



Getty Images / 멀티비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이 배우의 한계는 어디일까. 꽃미남의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고 다양한 연기 변신을 시도하던 그는 최근 북미 지역에서 개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J. 에드가(J. Edgar)’를 통해 또 한번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창시자로 평생을 국가에 헌신했던, 그러나 과한 야망과 무서운 독선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문제적 인물. 그런 ‘J 에드가 후버’는 디캐프리오를 통해 생생하고 입체적이고 또 깊이 있게 스크린 위로 살아 돌아왔다. 정치적 논란도 많았고 후대의 평가도 엇갈렸던 인물이다. 영화의 절반가량은 말년의 후버를 그렸다. 백발의 노인을 연기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쉬운 결정, 만만한 도전이었을 리 없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떤 과정이었을까.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J. 에드가’ 기자회견에서 디캐프리오를 만났다.



●왜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됐나.



 “대본에 완전히 매료됐다. J. 에드가는 너무도 매력적인 초상이었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절대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비밀에 싸여 있고 논란의 대상인 인물이기도 했다. 복잡하면서도 한편으론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이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게 즐거웠다. 개인적 삶을 모두 포기한 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국가와 정부를 위해 바친 그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J. 에드가란 인물을 그렇게 만든 동기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정말 흥미로웠다. 캐릭터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밝혀내야 할 비밀이나 탐험해 알아내야 할 구석이 많을 때 그때야말로 내가 영화를 맡겠다고 ‘예스(Yes)’를 외치는 때인 것 같다.”



●J. 에드가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해석했나.



 “천재였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하고 은행강도와 유괴가 판을 치던 치안 불안의 시대에 무서운 정보력과 권력을 가진 연방기구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모든 국가를 막론한 최고의 경찰 시스템으로 여겨지는 기관이다. FBI를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만나는 사람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고 조종할 수 있는 무서운 능력의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선 감정적으로 극도로 억눌려 있었다. 금욕주의자였고 독불장군이었다. 엄청난 마마보이기도 했다. 유일한 해방구가 자신의 일터였다. 그에게 FBI는 곧 종교였다. 다른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전혀 맺지 못했고, 스스로도 그래선 안 된다고 엄격히 자신을 통제했다.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사랑도 삶에서 완전히 배제했던 사람이다. 공산주의는 절대 악이라는 놀랍도록 굳은 믿음이 있었고, 강력한 권력과 드높은 명성을 손에 넣고 유지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말년의 J. 에드가에 대해선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위대한 커리어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본다. 비판을 수용하지 못했고 새로운 시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나 마틴 루서 킹, 인권운동을 비롯한 각종 시대적 요구들까지 모든 것을 ‘언젠가 이 나라에 더 큰 위협이 돼 돌아올 사회악’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J. 에드가가 애국자였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편 그의 전략과 신념 중 상당 부분은 아주 개탄스러운 것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훨씬 빨리 은퇴했어야 한다고 본다.”



●배역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워싱턴DC에 가서 실제 J. 에드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을 만나 많은 것을 들었다. 그가 어떻게 걸었고, 어떻게 말했고, 손은 어떻게 생겼으며, 책상 위엔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까지 모든 것을 다 말해 달라고 했다. 리서치 과정은 힘들기도 했지만 아주 재미있기도 했다. J. 에드가에 대한 대학 수업을 하나쯤 듣는 느낌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의 작업은 어땠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주 열려 있으면서도 이해심이 많은 감독이었다. 비전이 확실한 만큼 모든 것엔 간단명료한 모습이 아름다울 정도였다. 배우들이 정말 연기하기 편하게 해 준다. 그와 함께 촬영장에 있으면 갑자기 주변의 복잡한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영화 장면 속에 스며들어 실제 거기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모든 테이크를 한번에 찍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일해 보니 정말 그랬나.



 “이번 영화에서는 한 장면을 8~10번까지 찍었다. 배우들도 감독도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올 때까진 절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클린트가 원한 것은 단 하나, 연기하는 데 있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진실만을 말하라(Plant your feet and speak the truth)’는 것이었다. 배우들 모두가 그것만 신경 썼다.”



●J. 에드가와 그의 평생지기였던 FBI의 2인자 클라이드 톨슨의 미묘한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성애일까, 아닐까. 어떻게 해석했나.



 “FBI에 물어보면 ‘어림없는 소리다. 국가를 위해 둘이 함께 평생을 헌신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둘은 함께 살았고, 매일 점심·저녁식사를 함께했고, 심지어 여행도 같이 다녔어. J. 에드가의 모든 유산도 톨슨에게 남겼지. 뻔하잖아’라고 말한다. 분명한 건 둘은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서로 존중했고 사랑했다. 영화에선 그 관계를 규정해 정확한 마침표를 찍진 않는다. 촬영하면서도 일부러 그 모호함을 남겨 뒀다. 손을 잡는 장면이 있으면 그런 느낌으로 한 번, 그렇지 않은 느낌으로 다시 한 번을 찍는 식이었다. 이스트우드는 ‘사람들이 그 미묘함을 감지하게 하되 해석은 그들 몫으로 남겨 두자’는 식이었다.”



●노인 연기가 힘들진 않았나.



 “다행히 이스트우드가 노년 장면은 모두 촬영 후반으로 몰아줬다. 그래서 고민하고 준비할 시간이 더 많았다. 분장하는 데는 매번 5~7시간이 걸렸다. 연구도 정말 많이 했고, 미세한 움직임이나 자세 등에 대해서도 일일이 생각해 연기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눈에 보이는 움직임보다는 ‘정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노년의 J. 에드가가 새파랗게 어린 로버트 케네디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할 것인가’ 같은 디테일이었다.”



●파격적 분장을 감행했고,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연기했다. 두려움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배우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위대한 배역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스크린에서 그저 사랑스럽게 보이기만 하는 역할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역할도 나에게 그래 주리라고 본다. 내가 J. 에드가라는 인물의 사상과 업적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배우가 배역을 연기하는 데 있어 그 실존인물의 동조자가 돼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실제의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 판이하게 다른 사상의 사람을 연기할 때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환경보호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사실 환경은 내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다. 기업과 각국 정부들이 환경을 생각하는 많은 사람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릴 때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고 한때는 해양생물학자를 꿈꾼 적도 있었다. 촬영이 없을 때는 더 많은 시간을 환경운동에 쏟으려 한다. 자연보호를 위해 개인적으로 만든 재단이나 웹사이트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야생 호랑이의 멸종을 막는 일이다. 야자수 오일이나 목재가 필요한 기업들이 세계 각국의 숲을 사들이면서 야생 호랑이가 갈 곳을 잃어간다. 아마 텍사스주 동물원 우리에 갇힌 호랑이 수가 야생에서 살고 있는 호랑이 수보다도 많을 것이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안 될 일이다.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 싶다.”  





여든 넘었지만 열정은 여전한 거장…클린트 이스트우드 “지금이 내 전성기다 ”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왼)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백발의 노구지만 젊고 에너지 넘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말 그대로 ‘노인’이었다. 움직임은 느렸고, 청력이 많이 쇠한 듯 여러 번 기자의 질문을 놓쳤다. 옆에 앉은 디캐프리오가 거듭 귀에 대고 되풀이해 줘야 했을 정도. 하지만 영화에 관해서만은 그는 여전히 청년이었다. 진지하고 깊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자 했던 캐릭터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푸르디푸르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세계의 진화는 그래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왜 J. 에드가인가.



 “1930년대부터 그에 관해 듣고 알아왔다. 언제나 최고의 경찰 혹은 최고의 비밀요원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고, 항상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내가 한창 자랄 때는 그를 소재로 한 만화책도 있었고 시리얼 상자에도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이 없었다. 그래서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언제나 궁금했다. 작가인 더스틴 랜스 블랙이 많은 조사와 연구를 통해 빚어낸 대본을 가져왔을 때 곧장 홀려 버리고 말았다. 그 안에서 오늘날의 미국 혹은 우리가 살고 있고, 속해 있는 크고 작은 사회들과 비슷한 모습도 많이 읽혔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간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외압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FBI 측에서 사전에 대본을 확인한 일도 없다. 그들은 그저 이런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에 아주 고무돼 있었다. FBI 쪽의 반응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드십시오. 우리가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가 전부였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어떻게 평가하나.



 “정말 명석한 배우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색다른 장면을 연기하는 걸 아주 즐겼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주 힘든 연기였을 텐데, 작품에 완전히 헌신해 줬다. 영화를 보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배우로선 은퇴를 선언했지만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수도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처음 연출을 시작했을 때도 ‘이젠 감독 일에만 열중하겠어’ 생각했었고, 최근에도 ‘몇 년간 카메라 뒤에만 숨어 있어야겠다’ 생각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항상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배역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끔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필요한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맡기지, 뭐’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선택은 언제나 작품에 달렸다. 느낌이 오는 배역이면 내 나이가 몇이건 언제든 하고 싶다. 좋은 작품이지만 내게 안 어울리는 작품이면 안 한다. 작품도 좋고 내가 완벽히 들어맞는 배역이라면,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불꽃’이 튄다면 맡을 수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직까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젊은 시절만이 우리의 전성기라고 믿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각자에겐 자신만의 전성기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나에겐 우연히도 그 전성기가 지금이다. 예전에 비해 부족하고 무뎌진 부분도 분명 있겠지만, 또 다른 많은 부분에선 젊은 시절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