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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이름만 들어도 뿌듯한 국수, 55년간 12명뿐

중앙일보 2011.11.18 00:36 종합 35면 지면보기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국수’라는 이름은 그 상징성 때문에 상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16일 전기 국수 최철한 9단을 3대2로 꺾고 12번째 국수에 오른 조한승 9단(오른쪽)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 옆에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국수전 결승에서 조한승 9단이 최철한 9단과 막판까지 가는 피나는 혈전 끝에 3대2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2대2로 팽팽한 상태에서 16일 열린 마지막 대국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막판 행운이 따라준 조한승의 1집반 승으로 끝났다. 55년 역사의 국내 최고(最古) 기전인 국수전에서 지금껏 국수 자리에 오른 기사는 12명뿐이다. 조한승이 바로 12번째 국수다.

조남철·김인·이창호 … 조훈현 16회로 최다 차지
루이나웨이 유일한 여성



 1956년 제1회 국수전 결승은 조남철 5단(당시) 대 신호열 2단의 대결이었고 조남철이 2대1로 이겨 초대 국수가 됐다. 신호열 선생은 유명한 한학자로 서울대 교수로도 재직했다. 생전에 전국의 유명 교수들이 그의 집을 찾아가 배웠다. 젊은 시절에 노사초 국수를 따라 바둑을 두며 전국을 유랑했는데 이때 익힌 실력으로 당대의 조남철에게 1승을 건졌으니 실로 대단한 기재가 아닐 수 없다. 63년과 64년엔 이창세 3단이 도전했으나 아쉽게 1대3, 2대3으로 졌다. 이 패배 후 이창세는 바둑판을 등지고 홀연히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훗날 볼가강의 호화 유람선을 사들여 그 기념 행사로 93년 국수전 결승전을 초청, 볼가강 선상에서 열었다.



 1966년 김인 5단(현 9단)이 조남철 8단을 3대1로 꺾고 국수가 됐다. 조남철의 9년 철옹성이 무너졌고 ‘바둑=조남철’이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인은 존경받는 인품으로 지금도 ‘영원한 국수’로 불린다. 하지만 군생활 때 대통령 선거에 불참한 죄로 화가 난 부대장에게 “국수냐, 짜장면이냐” 소리를 들으며 정강이를 걷어차인 일도 있다. 김인 이후의 과도기에 윤기현 9단과 하찬석 9단이 2년씩 국수에 올랐다. 그리고 1976년부터 조훈현 폭풍이 시작된다. 조훈현 9단은 10년 연속 국수 위에 오른 뒤 87~88년 잠시 서봉수 9단에게 국수 자리를 내준다. 이때가 유명한 조(曺)-서(徐) 쟁패 시기로 조-서는 국수전 결승에서만 9년 연속 격돌했고 조훈현은 통산 16번 국수가 된다.



 1990년, 15세 소년 기사 이창호 4단(당시)이 스승 조훈현을 꺾고 국수 타이틀을 쟁취한다. 이창호는 국수전에서 10번 우승했다. 그 후 국수 타이틀은 루이나이웨이 9단, 최철한 9단(3회 우승), 윤준상 8단(1회 우승), 이세돌 9단(2회 우승)으로 흘러간다. 루이 9단은 2000년 이창호-조훈현 사제를 연파하고 여자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국수에 오른다.



 현존 프로기사 중 김인은 김국수, 조훈현은 조국수, 이창호는 이국수로 불린다. 서봉수는 서명인, 유창혁은 유왕위다. 역대 1인자 중 이세돌 9단만 아직 호칭이 없다. 이국수로 부르면 이창호와 구별하기 어려운 데다 또 그가 세계대회에서 주로 우승한 탓도 있다. 12번째 국수 조한승은 조국수로 불릴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조한승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거쳐간 국수 타이틀을 얻게 돼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국수전 우승상금은 4500만원. 수억원짜리 세계대회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프로들에게 국수라는 이름은 그 이상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역대 국수 12인

▶ 조남철 9단(9회) ▶ 김인 9단(6회) ▶ 윤기현 9단(2회) ▶ 하찬석 9단(2회) ▶ 조훈현 9단(16회) ▶ 서봉수 9단(2회) ▶ 이창호 9단(10회)

▶ 루이나이웨이 9단(1회) ▶ 최철한 9단(3회) ▶ 윤준상 8단(1회) ▶ 이세돌 9단(2회) ▶ 조한승 9단(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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