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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순례기 <상> 성 오틸리엔 수도원 - 기도하라 일하라

중앙일보 2011.11.18 00:06 종합 30면 지면보기
독일 바 이에른 주뮌헨 근교에 있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 전경. [백성호 기자]


어쩌면 그곳은 감옥이다. 스스로 수인(囚人)이 된 채, 그리스도를 찾고자 내 안으로 무한히 내려가는 공간. 세상은 그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이 살까. 아침은 뭘 먹고, 점심에는 뭘 하고, 잠은 얼마나 잘까. 물음표투성이인 그곳을 역사는 ‘가톨릭의 필터’라고 부른다. 14일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으로 유럽에서 ‘가톨릭 영성의 심장’ 수도원을 순례했다. 독일·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4개국을 돌았다. ‘유럽 수도원 순례기-가톨릭 영성을 따라서’를 3회 연재한다.

독일 시골 ‘침묵의 수도원’ … 그곳에 김대건 신부 있다





15일 독일 뮌헨에서 서쪽으로 1시간을 달렸다. 성 오틸리엔은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목장에는 말이 풀을 뜯고, 숲이 우거진 동네였다. 그곳에 1884년 지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이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순례자 숙소 앞에는 어린 양을 안고 지팡이를 든 예수상이 서 있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랬다. 길을 잃은 어린 양의 심정으로 사람들은 수도원을 찾았다.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수사들의 한마디가 내 삶의 돌파구가 되진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순례객들은 수도원의 숲길을 걸었다. 수도원 안에는 출판사도 있고,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도 있고, 중·고교도 있었다. 모두 수사들이 꾸리는 살림이었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이다.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 부산 광안리의 베네딕도 수녀원이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국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어둠이 내렸다. 수도원을 산책하는데 종이 울렸다. ‘대~앵, 대~앵’ 검은 옷을 입은 수사들이 바쁜 걸음으로 성당으로 모였다. 저녁 미사시간이었다. 급히 가서 성당에 앉았다. 연단(演壇)에는 사각의 제대가 있었다. 제대를 떠받치는 인물상 중 하나가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고(故)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였다. 제대 안에는 김 신부의 유해 일부가 있었다.



 외국인 수사가 줄지어 들어왔다. 수도원의 미사,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일반 신자들도 보였다. 수사들은 1000년 전 라틴어로 만들어진 그레고리안 성가를 불렀다. 눈을 감았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성가가 가슴을 타고 흘렀다. 아름다웠다. 저들은 무엇을 찾는 걸까. 무엇을 위해 21세기에 1000년도 더 넘은 삶의 양식을 고집하는 걸까.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저 가락을 통해 그리스도를 불렀을까.



 베네딕도 성인은 1500년 전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강하다. 현재 유럽 수도원의 70~80%가 베네딕도 수도회 계열이다. 유럽의 수호성인도 다름 아닌 성 베네딕도다. 베네딕도 당시 수도자들은 사막(광야)이나 외딴 동굴로 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금욕적인 고행을 했다.



그걸 통해 그리스도를 찾았다. 베네딕도는 로마에서 공부를 하다가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수도자가 됐다. 은수자(隱修者) 생활을 하다가 수비아코 동굴에서 3년간 머물기도 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모였고, 결국 은둔생활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성 베네딕도는 무작정 고행에 반대했다.



“이 배움터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지나치게 괴로운 일이 일절 발을 붙일 수 없기를 바란다. 우리가 믿음 속에서 살면 하느님 계명을 따르는 좁은 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달콤함으로 채워질 것이다.” 좁은 길의 달콤함, 그게 베네딕도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걸 수도원 규칙에 녹였다.



 베네딕도는 ‘영적 독서’를 강조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며 교회를 사업 수단처럼 키우는 일부 목회자에겐 폐부를 찌르는 칼날이다. 베네딕도가 말한 ‘영적 독서’란 뭘까. 그 답을 성 오틸리엔 수사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수사들은 수시로 침묵했다. 밥을 먹을 때도 침묵을 지켰다. 대신 한 명씩 당번을 정해 식사시간 동안 성서를 읽었다. 다른 수사들은 성서 읽는 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했다. 저녁기도 후에는 다음 날 아침기도까지 밤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게 수도원의 규칙이었다.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마우루스 블로머(50) 수사를 만났다. 그에게 ‘침묵의 가치’를 물었다. 그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신의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해야 한다. 단지 말을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침묵도 포함한다. 세상의 소리는 크게 울린다. 그 속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소리는 작다. 우리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선 침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사들은 기도만 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든, 소나 돼지를 키우든, 책상을 만들든, 학생들을 가르치든 각자 자신의 일이 있다. 한창 중요한 일을 하다가 점심기도 종이 울릴 때도 있다.



“1분만 더 하면 일이 마무리되는데. 갔다가 와서 다시 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텐데” 싶어도 수사들은 종소리와 함께 손을 딱 멈춘다. 이유가 있다. 수도원 출판 총책임을 맡고 있는 치릴 세퍼 수사는 “성 베네딕도는 ‘오라 엣 라보라!(기도하라, 일하라!)’라고 말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영성과 노동을 병행한다.



둘 다 중요하다.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의 노예가 돼도 곤란하다. 일을 하다가 아무리 중요한 마무리가 남아도 종이 울리면 즉각 일을 멈춘다. 수도복으로 갈아입고서 기도를 하고 돌아오면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릴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수사들은 일을 하되 집착 없이 하는 걸 익히고, 또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또 기도였다. 따로 따로가 아니었다.



 성 베네딕도가 강조한 ‘좁은 길의 달콤함’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았다.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수사들은 기도과 노동을 통해 그걸 일구고 있었다. 수도원 울타리에 갇힌 수사들의 눈은 고요하고, 깊고, 생기가 넘쳤다. 반면 울타리 밖의 현대인은 바쁜 일상에 쫓기며 하루하루 지쳐간다.



 갇힌 자는 과연 누구일까. 사실 일상은 현대인의 수도원이다. ‘일상’이란 거대한 수도원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정작 명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우리에겐 노동만 있고, 명상은 없는 게 아닐까. ‘대~앵, 대~앵!’ 지금도 울리는 내면의 종소리를 외면하며 사는 건 아닐까. 수도원을 나서며 그런 물음이 자꾸 올라왔다.



성 오틸리엔(독일)=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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