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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땅속에서 40억년 전 지구를 보다

중앙일보 2011.11.04 04:00 Week& 4면 지면보기
호주는 우리나라 아래쪽에 있다. 비행기 타고 가는 시간은 미국이나 유럽과 비슷한데 시차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차이다. 대신 다른 게 있다. 계절이 정반대다. 그래서 호주 여행은 밤낮이 바뀌는 수고는 덜하지만, 다른 계절을 살아야 한다.


중앙일보·라푸마 공동기획 해외 국립공원을 가다 ⑤ 호주 카리지니 국립공원

호주 대륙 북서쪽에 카리지니(Karigini) 국립공원이 있다. 호주 대륙에서도 오지 중 오지에 있는 이 국립공원이 최근 국내에 단박에 알려지게 된 일이 있었다. TV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이 국립공원을 다녀오면서 지구의 끝이 연상되는 이 막막한 오지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됐다.



카리지니 국립공원에 가면 ‘고지(Gorge)’라고 불리는 협곡이 있다. 지상에서 100m 아래로 깊고도 날카로운 홈이 파여 있는데, 이게 고지란 지형이다. 그 위태위태하고 가파른 틈새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는 짓이 카리지니 국립공원을 온전히 둘러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등산 장비를 갖추고 먼저 아래로 내려간 경험은 정반대 계절의 나라 호주여서 어쩌면 어울리는 일이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지구의 중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핸콕 고지 아래. 이 절벽에서 한 번 더 자일을 타고 20m쯤 내려가야 지하 105m ‘지구의 중심’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 깎아지른 절벽에 걸터앉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 거대한 뱀의 전설



카리지니 국립공원의 면적은 6274㎢. 서울 면적(605㎢)의 열 배가 넘는다. 카리지니가 있는 서호주 북부 필브라(Pilbra) 지역은 세계에서 꼽히는 지질학적 보고다. 국립공원에 있는 아홉 개의 고지 덕분이다.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연상되는 이 지형이 형성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35억∼45억 년 전 해저 바닥에 수십억 년 동안 해저 화산이 터지고 흙이 쌓이는 과정이 거듭됐고, 세월이 흐르며 물이 빠져나가 해저 바닥이 지상으로 드러난 상태에서 다시 오랜 세월 풍화·침식·단층 작용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아무튼 이 복잡한 해설의 결론은 단 하나다. 원시 지구의 모습이 카리지니 고지 아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카리지니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의 성지이기도 하다. 애버리진 언어인 카리지니는 ‘만남의 장소’라는 뜻이다. 애버리진이 이 신성한 공간에 모여 의식을 치렀음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애버리진은 난해한 지구과학 이론 대신 고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옛날 옛적에, 그러니까 호주 대륙이 막 생겼을 때 ‘왈루(Walu)’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다뱀이 살았다. 바다에서 뛰쳐나온 왈루는 호주 대륙의 서북쪽에 있는 붉은 땅을 헤치고 지나갔는데, 왈루가 지난 흔적을 따라 깊은 물길이 생겼다. 그 물길은 서쪽 해안의 닝갈루(Ningaloo)에서 내륙의 카리지니를 거쳐 북쪽 해안의 브룸(Broome)까지 연결된다.”



 이 전설이 이른바 ‘왈루의 길’이다. 닝갈루부터 브룸까지 2480㎞나 이어지는 이 길은 현재 호주 아웃백(Outback·오지)을 탐험하는 대표적 오프로드 코스이기도 한데, 이 길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구간이 바로 카리지니의 고지다. 애버리진 전설처럼 카리지니의 고지는 뱀이 지나간 흔적을 닮아 있다. 지하 100m 아래 뱀이 지나간 자리에서 든 생각은 “때로는 과학보다 미신이 더 강력하다”는 뜬금없는 믿음이었다.



# 카리지니를 탐험하는 방법



1, 2 카리지니 국립공원에서는 호주 아웃백에서 사는 야생동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진 1번은 아웃백에서 사는 타타 도마뱀, 사진 2번은 사람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은 스피너펙스(Spinifex) 비둘기. 3 녹스 고지 바닥의 모습. 녹스 고지는 특히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이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장소여서 큰소리로 떠드는 것도 삼가야 했다.
베이스캠프는 카리지니 국립공원 안에 있는 ‘에코 리트리트(Eco Retreat)’였다. 붉은 사막 위에 임시 가옥과 텐트가 덩그러니 놓인 난민촌 같은 장소다. 띄엄띄엄 놓인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임시 가옥처럼 생긴 방문자 센터에서 식사를 한다. 텐트는 전기도 들어오고 샤워시설도 갖춰져 있지만 그게 전부다. 더 있다면 개구리가 텐트 안으로 들어오고 지붕만 살짝 얹은 샤워시설 옆으로 별빛이 비친다는 것 정도.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직원 피트 웨스트가 한마디 했다.



 “No Phone, No Internet, No Stress(노 폰, 노 인터넷, 노 스트레스)!”



 고지 탐험은 어찌 보면 단순했다. 우리 일행은 카리지니에 있는 고지 9개를 하나씩 섭렵해 갔다. 고지마다 난이도가 달랐는데, 녹스 고지(Knox Gorge)나 데일스 고지(Dales Gorge)는 가벼운 트레킹에 가까웠다. 반면 조프리 고지(Joffre Gorge)는 거의 직각으로 서 있는 붉은 절벽을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 층층이 쌓인 바위 층을 손과 발로 차례로 붙잡고 디디면서 조심조심 내려갔다.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해야 하느냐”는 우리의 표정을 읽은 피트가 톡 쏘듯이 말했다.



 “Karigini does not give a beauty easily.(카리지니는 아름다운 풍경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카리지니 탐방은 다른 표현으로 호주 아웃백의 야생동물과 조우하는 일이다. 크고 작은 도마뱀과 맞닥뜨리는 건 물론이고, 발아래를 조심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독사를 밟을 수도 있다. 해질 무렵 서호주에서 둘째로 높은 산이라는 마운트 브루스(Mt. Bruce)를 오를 때 정말 독사를 밟을 뻔했다. 가까스로 화를 피한 우리 일행은 왈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말했었나? 때로는 미신이 더 강력하다고.



 
4 서호주 지역에서 둘째로 높은 산이라는 마운트 브루스 의 모습. 붉은 사막 위에 우뚝 솟아 있다. 




# 지구의 중심에 서다



서호주 카리지니 탐험은 지금 생각해도 낯선 경험이었다. 계절이 정반대인 남반구의 나라에서 한 짓이라곤 악착같이 절벽에 매달려 오르내린 게 전부다. 그런데 여기 절벽은 먼저 내려가야 한다. “오르지 않고 내려올 생각부터 하느냐”는 어느 선승의 일갈은 적어도 카리지니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상상해보시라. 지평선처럼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사바나 기후여서 키 작은 잡목 따위나 겨우 자라는 척박한 땅이다. 그 지평선이 별안간 눈앞에서 사라진다. 대신에 발아래로 깎아지르는 절벽이 땅 아래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절벽도 온통 붉은색이어서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거대한 동물이 ‘쩍’ 하니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섬뜩한 기운마저 이는 이 아가리 안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갔다.



 카리지니 고지 중 핸콕 고지(Hancock Gorge)는 별명이 ‘지구의 중심(Center of the Earth)’이다. 카리지니에서 가장 깊은 고지로 지상에서 105m를 내려가야 한다. 워낙 가팔라 두 차례에 걸쳐 자일에 매달려 30m쯤 이동해야 한다. 발아래로는 10여m 깊이의 낭떠러지가 있고, 벼랑 아래에는 어른 키가 훌쩍 넘는 웅덩이가 파여 있다.



 온갖 안전장비를 갖추고 자일에 의지한 채 한숨 푹푹 쉬며 내려간 곳에는 태고의 빛깔을 머금은 연못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여기가 지구의 중심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은 그러나 무언가 허전해 보였다. 달랑 연못 하나라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풍경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지금 눈앞에서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솟구쳐 승천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핸콕 고지를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데는 꼬박 6시간이 걸렸다. 다시 자일에 매달려 절벽을 기어오르다 문득 낯선 느낌을 받았다. 일정을 마치는 하산(下山)의 절차인데, 걸음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여태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의 가치가 하염없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건 또 있다. 이 험한 데를 ‘국민 약골’ 연예인 이윤석씨가 내려갔었다.



●여행정보 호주 서북쪽에 있는 카리지니 국립공원을 가려면 서호주 주도(州都) 퍼스(Perth)를 거쳐야 한다. 퍼스에서 국내선 항공을 갈아타고 파라버두(Paraburdoo)까지 간 뒤 다시 버스와 4륜 구동 자동차를 타고 3시간쯤 더 가야 카리지니 국립공원이다. 싱가포르항공(www.singaporeair.com)이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서울∼퍼스 구간을 매일 3회 운영하고 있다. 국내 여행사 중에서는 워너투어(www.wannatour.com)가 ‘남자의 자격 따라잡기’서호주 아웃백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02-3477-7555. 코코스 여행사(02-318-1998)와 피터팬 트래블(070-7404-9751)도 서호주 아웃백 상품을 판매한다. 서호주관광청(www.westernaustralia.com), 호주정부관광청(www.austral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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