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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유럽에선 … “인기 없는 정치 리더들의 초강수 게임”

중앙일보 2011.11.04 00:15 경제 2면 지면보기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1일(현지시간) “긴축재정안과 유럽연합(EU) 탈퇴를 묶어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하면서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 사진은 그리스 아테네의 한 시민이 국민투표 제안 기사가 실린 신문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 [아테네 블룸버그=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56) 프랑스 대통령은 일단 돈줄부터 차단했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그리스 총리의 국민투표에 대한 독일·프랑스의 첫 대응이다.


[뉴스분석] 앞이 안 보이는 그리스 사태

 메르켈·사르코지는 3일 새벽(한국시간) 프랑스 칸으로 파판드레우를 불러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을지를 결정할 때까지 한 푼도 지급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구제금융 80억 유로(약 12조4000억원)를 일단 주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 돈은 애초 이달 중순부터 그리스 통장에 입금될 예정이었다. 또 두 사람은 “우리는 그리스와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싶지만 유로화 시스템의 안정이 그리스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로 시스템 안정을 위해 그리스를 방출하거나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파판드레우의 벼랑 끝 전술에 메르켈·사르코지가 최후통첩으로 응수한 셈이다.



 이날 유럽 채권시장은 사실상 패닉에 빠졌다. 장 초반 그리스 2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연 100%를 넘었다. 사상 최고 수준이다. 다음 위기국으로 꼽힌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위험 수준인 연 6.39%를 기록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약체 정치리더들의 초강수 게임”이라고 평했다. 세 사람 모두 자국 내에서 인기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 실제 파판드레우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긴축에 대한 국민 반발과 독일·프랑스 등 채권국의 압박 사이에 끼여 있는 상황이었다. 나날이 집권 사회당 의원들의 지지도 줄어들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그게 바로 국민투표였다”고 FT는 풀이했다.



 메르켈과 사르코지도 국내 지지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끊임없이 그리스에 돈을 퍼줘야 하는데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런 와중에 파판드레우가 한마디 귀띔도 없이 국민투표를 선택했다. 독일·프랑스 국민 눈에 적반하장으로 비칠 만한 사건이었다. FT는 “메르켈과 사르코지는 자국민의 분통을 의식해 (대화나 타협보다) 곧바로 최후통첩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구제금융 중단을 정치적 노림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로이터 통신은 “(돈줄 차단이) 어쩌면 파판드레우 흔들기일 수도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그리스 의회가 4일 실시한 파판드레우에 대한 신임투표와 국민투표법 제정을 이틀 앞두고 산소호흡기(구제금융)를 뗐기 때문이다. 구제금융 중단은 그리스 의원들에게 잘 선택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의원들은 오늘 밤 두 가지를 결정해야 한다. 파판드레우 재신임과 국민투표법 제정이다. 그리스 정치평론가인 안소니 리바노이스는 월스트리트 저널(WSJ)과의 3일 인터뷰에서 “집권 사회당 의원 누구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총리를 실각시키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며 “파판드레우가 재신임받지 못하면 오히려 놀랄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투표법은 다른 이야기다. 집권 사회당 의원들은 파판드레우를 재신임하면서도 국민투표법은 부결할 수 있다. 실제 당내 분위기도 국민투표에 호의적이지 않다. 파판드레우가 국민투표를 결정한 직후 집권당 의원 한 명이 탈당했을 정도였다. 파판드레우는 국민투표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집권당 의원들마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면 그의 존재감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막기 위해 파판드레우는 필사적으로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키려고 한다. 그는 3일 새벽 급거 귀국했다. 집권당 의원들과 연쇄적으로 접촉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내년 1월까지 늦추지 않아도 된다”며 “이르면 12월 4일에도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의회가 국민투표법을 제정하면 그리스 국민은 짧아도 12월 4일까진 구제금융 없이 살아야 한다. 영국 BBC 방송 등은 “최근 여론조사 결과 그리스 국민 58%가 유로존의 포괄적인 위기대책(그랜드 플랜)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에 “50% 정도는 유로화를 그대로 사용하길 원한다”고 전했다. ‘국민투표=유로존 탈퇴’라는 시장의 우려가 지나친 걱정일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투표에서 긴축과 유로존 잔류가 결정되면 그랜드 플랜대로 구제작전이 더 잘 진행될 수 있다. 외채 원금과 이자 50%를 탕감받고 새 구제금융 1300억 유로(약 201조5000억원)를 도움받을 수 있다. 대가는 고강도 긴축이다.



 그러나 여론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그리스 국민이 유로화 포기를 선택하면 국가부도는 피할 수 없다. 메르켈·사르코지의 이날 최후통첩이 다른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려서다. 그리스가 유로화를 완전 포기하고 옛 화폐 드라키마를 부활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다. 대외 교역의 혼란 등 그 대가가 너무 크다. 그래서 UC버클리 경제학 교수인 배리 아이켄그린의 시나리오가 주목받고 있다. 평소 아이켄그린은 “영국이 1차대전 발발 순간(1914년)에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2001년 위기 때 했던 것처럼 국내용 통화(쿠폰)를 발행해 공무원 임금이나 복지급여 삭감분을 메워 국내 수요를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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