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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한국전 참전 두 달 전 이미 전쟁예산 짜”

중앙일보 2011.11.03 00:42 종합 14면 지면보기
추이 박사
“중국은 북한의 6·25전쟁 계획과 준비 과정에 알려진 것보다 더 일찍, 그리고 깊숙이 개입했다.” 6·25전쟁 참전국인 중국의 입장에서 참전의 배경과 목적을 추적한 데이비드 추이(徐) 박사는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추이 박사는 논문 작성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의 기밀자료를 인용한 혐의로 붙잡혀 11년간 옥고를 치르다 지난 6월 석방됐다. 추이 박사가 쓴 문제의 논문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출판을 준비하던 중 추이 박사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여태 빛을 보지 못했다.


데이비드 추이 박사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논문 입수

 논문 작성을 위해 그가 증언을 들은 인사에는 1949년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Iosip Stalin·1878~1953)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1893~1976)의 6·25전쟁 관련 회담을 통역했던 스저(師哲·사철)와 압록강을 처음 건넌 중국 인민해방군(인민지원군 명의로 참전) 제42군 사령관 우루이린(吳瑞林)도 포함됐다.



스탈린(左), 마오쩌둥(右)
 본지가 최근 입수한 그의 논문에 따르면 50년 8월 23일 전쟁 예산이 확정돼 마오에게 보고됐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구한다)를 내걸고 중공군이 참전하기 약 2개월 전 참전 예산을 미리 확정한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미군이 북진해 38선을 돌파하기 한참 전인데도 참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압록강을 건널 시점만 재고 있었던 것이다. 추이 박사가 인터뷰한 쉬옌(徐焰) 중국 국방대학 교수는 “이듬해인 51년의 군사비 지출은 국가 전체 예산의 절반에 달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대가로 전쟁을 막후에서 총지휘한 스탈린으로부터 국가재건 프로젝트 156개의 지원을 확보했다. 중공군 100개 사단(약 150만 명)을 소련의 현대 무기체계로 무장시키는 실속도 챙겼다.



 전쟁 준비 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한 중국은 50년 1월부터 남한에서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8월에는 중공군 지휘관들을 북한인으로 위장시켜 북한 지역을 정찰하기도 했다. 전쟁 발발 전 이미 조선족 통역요원 2000여 명을 참전 대기 부대에 배치하는 등 남침한 북한과 보조를 맞췄다. 이같이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중국의 역할은 이 전쟁이 옹진반도 등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분쟁이 자연스레 남북 내전으로 발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68)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추이 박사는 스탈린이 6·25전쟁의 개시자이자 총감독이라고 규정했다. 제1주자인 김일성뿐 아니라 바통을 이어받을 제2주자(마오)까지 준비를 끝낸 채 전쟁을 시작했다고 논파했다.



 전쟁 준비 단계에서 스탈린·마오·김일성이 저지른 결정적 오판은 미군의 참전 여부였다. 이들은 미국이 무장해제해 본국으로 돌려보낸 일본 관동군 6만~7만 명 정도를 용병으로 고용해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이 경우 압록강 너머에 대기시켜둔 중공군 40만 명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추이 박사는 “미국이 해·공군뿐 아니라 본토에서 지상군을 파병할 것이란 예상을 했다면 6·25전쟁보다 친북 좌파를 키워 남한 내부를 흔드는 ‘인민전쟁’을 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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