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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부는 영성(靈性) 바람 <하> 자연의 명상, 문명의 각성 - 아미쉬 공동체

중앙일보 2011.11.03 00:05 종합 29면 지면보기
펜실베이니아주 아미쉬 마을의 아이들이 도시락을 든 채 길을 가고 있다. 아미쉬 특유의 모자와 남녀 복장이 눈길을 끈다. 아미쉬 학교는 교실 하나에 선생님 한 명이다. 전 학년이 한 교실에서 배운다.


반반이었다. ‘아마도’하는 기대 반, ‘혹시나’하는 의구심 반. 그만큼 아미쉬 공동체는 물음표덩어리였다. 지난달 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카운티의 니켈마인스로 갔다. 그곳에 아미쉬 공동체가 있었다. 그들은 옛날 복장을 하고 옛날 방식으로 살아간다 자동차 대신 마차를 끌고, 트랙터 대신 말을 부리며 농사를 짓는다. 전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런 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동시대 문명을 거부하는 그들의 생활은 과연 자연스런 걸까. 기대 반, 의심 반의 마음으로 니켈마인스로 갔다.

‘미국의 청학동’ 아미쉬 마을이 지키려는 것은 …



필라델피아에서 서쪽으로 2시간쯤 달렸다.흥미로운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도로 양 옆으로 마차가 달렸다. 전통 모자를 쓴 아미쉬 마을의 남자가 말을 몰고 있었다. 검정 옷에 기다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길옆을 지나가는 아가씨도 보였다. 하얀 천으로 뒷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개척시대를 다룬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에나 나올 법한 스커트 차림이었다. 아미쉬는 미국인에게조차 ‘낯선 사람들’이다.



이유가 있다. 아미쉬 사람들에겐 오래된 아픔이 있다.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처다. 중세 유럽에선 종교개혁이 한창이었다. 부패한 가톨릭에 맞서 개신교가 등장했다. 개혁파 안에는 더 개혁적인 그룹도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재세례파였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갓난 아이는 죄가 없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성인이 돼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목사는 죄를 용서해 줄 수가 없고, 목사가 성찬대에 올려놓은 빵은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양식일 뿐이라고 믿었다. 물을 이용한 세례로 어떠한 구원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개혁파 중에서도 급진적이었다.



결국 그들은 가톨릭뿐 아니라 마르틴 루터 중심의 주류 개신교로부터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 중세 때 재세례파는 숱하게 화형을 당하고, 집단학살도 당했다. 그들이 성경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순례자의 거울』(재세례파의 고난을 기록한 책)이라는 두툼한 책에는 그런 ‘아픔의 역사’가 낱낱이 기록돼 있다. 그 와중에도 재세례파는 비폭력 평화주의로 일관했다. 심지어 자신을 쫓던 보안관이 얼음이 깨져 강에 빠지자, 도망가다 돌아와 그를 구해준 뒤 체포돼 화형을 당한 이도 있었다.



아미쉬 마을 주민들이 트랙터 대신 말을 이용해 옥수수를 수확하고 있다.
아미쉬 마을도 그랬다. 평화로웠다. 그들은 옛날 방식을 고집했다. 언뜻 보면 ‘외형적 고집’이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달랐다. 그건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내면적 고집’이었다. 아미쉬 마을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랭커스터의 넓은 지역에 아미쉬 농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뭘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과연 뭘까. 어쩌면 그게 그리스도교의 원시적 순수성은 아닐까. 2006년 10월 2일이었다. 랭커스터의 아미쉬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에 외부인이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5명의 여학생이 죽었다. 또 다른 학생 5명은 중태에 빠졌다. 세계의 매스컴은 아미쉬를 주목했다. 범인은 아미쉬 마을에서 우유를 수거해가던 트럭 운전사였다. 9년 전 자신의 딸이 출산 직후 사망한 게 신의 저주라며, 이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했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도 자살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아미쉬 사람들의 대응은 놀라웠다. 범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명복을 빌었던 조문객의 절반이 아미쉬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전국에서 날아오는 성금을 범인의 유가족을 위해 먼저 써달라고 요청했다. 실제 학생들의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 학교 이전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희생자 유족과 똑같은 비율로 범인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또 사건 발생 한 달 후에는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며 위로했다. 처음에는 매스컴도 “가식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에 그들이 무조건적인 용서로 답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아미쉬 사람들의 기도는 단조롭고, 깊고, 강하다. 그들에게 ‘믿음은 행함’이다. 날마다 식탁에서 외는 주기도문의 메시지를 그들은 삶속에서 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장 12절). 또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가 올렸던 겟세마네 기도를 가장 비극적인 삶의 순간에 실천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당시 범인은 교실에서 10명의 여학생을 나란히 세웠다. 마치 사형집행을 하듯이 말이다. 13세의 아미쉬 소녀는 앞으로 나서며 “나를 먼저 쏘세요(Shoot me first)”라고 말했다. 그러자 곁에 섰던 두 살 아래 동생이 “그 다음에는 저를 쏘세요(Shoot me next)”라며 말했다. 자신을 희생해 다른 친구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둘은 결국 죽었다. 중태에 빠진 학생들을 통해 뒤늦게 이 얘길 전해들은 미국 사회는 숙연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9·11 사태와 이라크 전쟁 등 미국 정부의 보복적 대응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고 한다.



아미쉬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말다섯 필을 끌며 옥수수 밭에서 수확을 하던 남자가 농기구를 연결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가서 도와줬더니 “땡큐!”라며 활짝 웃었다. 사람들은 따진다. 아미쉬는 왜 TV를 안 보고, 핸드폰도 없고, 자동차도 안 타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따로 있었다. “아미쉬가 동시대의 문명을 거부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행여 우리에게 그것은 결핍돼 있진 않나?”



지금도 그리스도교의 보수 교단은 그들을 ‘이단’이라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아미쉬는 묻는다. “둘째 단추를 꿰기 전에 당신은 첫단추를 꿰었는가.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당신에게 죄지은 자를 당신은 용서했는가.” ‘미국의 청학동’ 아미쉬는 그걸 묻고,또 묻는다.



필라델피아=글·사진 백성호 기자



◆아미쉬 공동체=종교개혁 후 유럽에서 생겨나 1700년대에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미쉬 공동체는 미국 25개 주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1600여 교구가 있다. 유럽에선아미쉬 공동체가 사라졌다. 미국의 아미쉬 교도 수는 약 24만 명이다. 아미쉬 인구는 20년마다 두 배로 늘고 있다. 인위적인 산아 제한을 금하고 있어 자녀를 많이 두고, 공동체를 이탈하는 수가 적다. 엄격한 가부장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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