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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헌책방 뒤지던 까까머리 … 희귀본 1만5000권 ‘책박사’ 되다

중앙일보 2011.11.01 00:26 종합 27면 지면보기
서가에 1만5000권이 빽빽이 꽂혀 있다. 윤길수씨는 서고에 외부인을 들이긴 처음이라고 했다. “왜 자랑하고픈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알려지면 분실·훼손을 막을 방법이 없어 여태 혼자 즐겼죠. 이제는 공유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① 윤길수씨가 가장 아끼는 『정지용 시집』. 1935년 초간본이다. 정지용(1902~50)의 시에 빠져 수집가의 길로 들어선 윤씨는 “80년대에 정지용 시인이 해금된 것이 일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었다”고 말했다. ② 천상병(1930~93) 시인의 육필 시 ‘귀천(歸天)’. 경문서림을 드나들던 문인들은 방명록 『심화첩』에 육필 시를 남겼다. ③ 윤동주(1917~45)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옥사한 시인의 유고 시집은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됐다. 도서 경매에서 최근 1600만원에 낙찰됐다.
“『정지용 시집』 있나요? 임화의 『현해탄』은요?” 1960년대 후반, 식자들의 사랑방이었던 서울 인사동 헌책방 경문서림. 까까머리 중학생 하나가 다짜고짜 물었다. 주인은 “그런 책 없다”며 월북작가의 금서를 찾는 당돌한 소년을 내쫓았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소년은 1만5000여 권을 소장한 장서가로 성장했다. 책 수집가 윤길수(59)씨다. 그가 소장 도서 목록집 『윤길수책-한국 근현대 도서목록 1895~2010』(도서출판b)를 냈다. 국내 최초의 양장본인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부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까지 1만4636권의 서지 정보를 시·소설·잡지·한국학·사진집·도록 등 8개 분야로 정리했다.

소장도서 목록집 펴낸 책 수집가 윤길수씨



한국 문학 각 분야에서 ‘최초’가 되는 책들, 부문별 10대 도서, 문학 경향에 따른 각종 서적의 표지 등도 망라했다. 40여 년 수집 인생과 한국 근현대 문학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책이다.



 경문서림에서 내쫓겼던 소년은 계속해서 서점을 기웃거렸다. 서점 주인은 “벌써부터 문학에 빠지면 대학에 못 가니, 정 모으겠다면 얇은 시집부터 하라”고 가르쳐줬다. 문학을 보는 눈, 책을 고르는 법까지 차근차근 알려줬다. 문학의 늪에 빠진 소년은 결국 대학에 낙방했다. 군 복무 후 ㈜한국이콜랩에 입사해 전무까지 지내고, 2007년 은퇴했다. “문학만큼은 끝까지 파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책을 사 모으고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었죠.”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픈 욕심에 은퇴 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도 다녔다. “3학년 때 배운 한국 현대문학사 교재에 21군데나 오류가 있더군요. 저자인 조남철 총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남겼죠. 증빙자료도 보내드렸고요. 결국 교과서를 새로 쓰셨죠.”



 원본의 힘이 발휘된 에피소드다. 근대 출판물로는 최초로 등록문화재가 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중앙서림본 등 소장 도서 90%가 초간본이다. 목록집엔 경문서림 방명록 『심화첩(心畵帖)』 자료도 실려 이채롭다. 윤씨가 2년 전 작고한 경문서림 송해룡 사장의 유품을 물려받은 것이다. 천상병·서정주·유치환·정한모 시인 등의 육필 원고와 서점을 드나들던 문인·학자들이 구할 책을 적은 메모가 담겼다.



 ‘문학 4호’를 구해달라는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옥루몽』 번역본을 구해달라는 박두진(1916~98) 시인의 메모 등 당시 서점을 드나들던 문인·학자들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반면 장만영(1914~75) 시인은 “어제 오백원 부탁 드렸으나 돈이 되면 천원으로 해서 주시면 합니다”란 메모를 남겨 책을 팔아 생계에 보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 목록집엔 국내에 10권도 안 남은 책이 수두룩합니다. 요샌 70~80년대 책 초간본도 구하기 힘들어요. 책을 마구 버리는 시대잖아요. 인쇄문화가 가장 앞섰고, 한글도 창제한 나라인데 창피한 일이죠. 누군가는 모아 남기고 기록해야 역사가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학술적으로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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