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공품과 사여품을 맞바꾸는 것이 공무역(公貿易)이라면 사행(使行)을 따라간 역관들의 상행위가 사무역(私貿易)이었다. 조선은 역관들에게 여비를 지급하는 대신 인삼 팔포(八包)를 가져가라는 무역권을 주었다. 역관들은 중국의 지배층에게 고려 인삼을 팔고, 그 돈으로 조선의 지배층이 선호하는 비단·금은 세공품 등을 가져와 이중으로 이익을 남겼다. 그래서 역관들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을 팔포무역(八包貿易)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명·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도 조선의 국부(國富)와 역관들을 살찌웠다. 청나라는 중기까지는 해금(海禁)정책을 썼기 때문에 일본은 청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청나라는 조공외교의 틀 속에서 조선과의 무역만 허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동래 왜관에서 조선 역관들에게 청의 물품을 구입하는 삼각무역을 해야 했다. 조선의 역관들을 상역(商譯) 또는 역상(譯商)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역원(司譯院:역관 관청)의 기록인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사행(使行)이 갈 때마다 응당 가지고 가는 팔포(八包)를 합하여 계산하면, 1년에 압록강을 건너가는 은화(銀貨)가 거의 50, 60만 냥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막대한 은화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조선은 사대교린이라는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면서 막대한 국제무역의 이익도 취했던 것이다.
한국이 일본에 이어 중국과도 통화 스와프를 확대한다는 소식에 선조들의 지혜로웠던 외교정책의 단상(斷想)이 떠올랐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