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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6) 광주민주화운동

중앙일보 2011.10.20 00:18 종합 31면 지면보기
신성일·장미희 주연의 ‘그 여자 사람 잡네’(1980).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이 등장한 1980년, 신성일은 이 작품을 포함해 고작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중앙포토]


나는 큰 일이 벌어지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귀동냥 성격이 아니다. 사태를 차분히 주시한다.

주영복 국방장관이 물었다 “누가 대통령 됐으면 좋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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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26 사태로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서울로 올라와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12·12사태를 접했다. 서울 한남동 국방장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것도 알았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이후, TV에서 머리가 훌렁 벗어진 전두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또 군인이다. 우리나라가 진짜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JP(김종필 전 총리)는 그 즈음 “국민에게 심판을 받겠다”며 공화당 총재직에서 물러났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JP에게 호감을 느꼈다. ‘3김(金)이 차례로 대통령 하면 되겠다. JP가 먼저 하고, DJ와 YS가 이어가면 좋겠다’는 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신군부가 정치인 부정축재 조사에 들어갔고, 이후락이 “난 콩고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JP와 이후락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됐다. 시국이 수상하게 돌아가는 기미가 보였다.



 12·12사태 이틀 후인 79년 12월 14일 조각(組閣)이 발표됐다. 우리와 절친한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은 국방장관으로 입각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가 신군부와 손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80년으로 접어든 어느 날, 주 장관이 우리 부부를 한남동 공관으로 불러들였다. 나와 엄앵란은 주 장관 부부와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아내가 주 장관 부인 ‘금주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고, 나와 주 장관은 공관 응접실 스탠드바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경남 함안 태생인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누가 대통령 됐으면 좋겠노?”



 나는 속내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JP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세 김씨가 차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함안 사투리로 투박하게 말했다. “아니데이. 전두환이가 된 데이.”



 “그거 안됩니다. 전두환이 되면 나라 망합니다.”



 그 말에 주 장관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런 말 하면, 너 큰일 난데이.”



 난 너무 실망해 그 자리에서 공관을 박차고 나왔다. 88년 5공 청문회 후 어느 행사에서 주 장관과 마주쳤다. 5공 청문회에서 주 장관은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여간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형님, 왜 청문회에서 ‘모르쇠’ 하십니까?”



 “그래야 내가 살지.”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뒤부터 주 장관과 말도 안 했다. 영원히 끝, 절연(絶緣)이었다.



 5공이 들어서면서 한국영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나의 영화로는 80년 장미희와 ‘그 여자 사람 잡네’ 같은 작품을 한 것이 위안거리랄까. 그 해 5·17비상계엄에 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광주 사람들은 5·6공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높인다. 난 5·18 당일 광주 현장에 있던 한 젊은 여인으로부터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이렇게 해도 됩니까”라는 피맺힌 절규를 배우협회 사무실 전화로 전해 들었다.



 광주 충장로와 금남로를 찾아가 현지인들에게 당시의 참상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수소문해보니, 내게 전화한 여인은 그 충격으로 수녀가 됐다고 한다. 대구는 번번이 정권 정당성 문제로 시비가 걸렸다. 사람이 총칼에 죽어가는 마당에, 영화 발전은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신성일 영화도 죽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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