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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중앙일보 2011.10.18 00:39 경제 2면 지면보기
손정의 회장이 14일 일본 도쿄 시부야 거리에 있는 소프트뱅크모바일 매장에서 애플 아이폰4S를 선보이고 있다. 손 회장은 초고속인터넷 사업 성공의 여세를 몰라 2006년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오른팔의 배신
초고속인터넷 올인하자, 믿었던 기타오 회사 살림 걱정하며 떠나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2001년 6월 19일, 드디어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보다 훨씬 빠른 서비스를, 그 8분의 1 요금에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야심 찬 출발이었지만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회선과 기지국을 빌려 줘야 할 NTT는 느리고 비협조적이었다. 가입 과정은 복잡했고 고객들의 인식도 낮았다. 서비스 체계 또한 손볼 곳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없었다. 융자를 얻고 싶었지만 은행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증자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가진 걸 팔기로 했다. 전략사업이라 생각해 온 것들까지 내놨다. 미국 야후 본사 주식도 넘겨 버렸다. 야후BB(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야후재팬 자회사)를 살리는 게 소프트뱅크가 살 길이요, 내가 꿈꾸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성큼 다가서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산매각 과정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맞닥뜨렸다. 최고재무책임자(CFO)인 기타오 요시타카(北尾吉孝)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 것이다. 노무라증권 뉴욕지점장 출신인 기타오는 1990년대 초부터 나와 정말 많은 일을 같이 해온 ‘동지’였다. 수많은 인수합병(M&A) 뒤엔 어김없이 기타오와 그가 이끄는 무적의 재무팀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등을 돌린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몰빵’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모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 초고속인터넷 ‘몰빵’에 회사 뛰쳐나간 CFO



 2002년 결국 기타오는 이사회멤버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소프트뱅크 본사 일부분을 뚝 떼어내 독립했다. SBI홀딩스란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창업자의 오른팔이자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나다니, 주가는 떨어지고 뒷소문이 난무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새 CFO를 물색했다. 후지은행 부사장으로 은퇴한 65세의 가사이 가즈히코(笠井和彦)를 영입했다. 기존 임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 데다 평생을 대형 은행에 몸담았다 명예롭게 퇴임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발도 넓어 기타오가 떠난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하는 이에게 재무책임자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돈 계산만을 앞세우다가는 도약을 위한 혁신과 모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기타오는 다시 없이 탁월한 인물이지만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의견만 따랐다면 오늘의 소프트뱅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기타오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여전히 그의 고견을 고맙게 듣는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여는 건 결국 내 몫이다.





# 사장실 버리고 회의실서 하루 19시간 집무



 그렇게 돈 마련하랴, NTT로 정부 부처로 뛰어다니랴 새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2001년 말 지금까지 실적을 체크하는 8시간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절망했다.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개통된 사용자는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 시작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큰소리 친 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비서에게 “앞으로 1년간은 그 누구와도 골프 일정을 잡지 마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내 집무실은 야후BB 추진팀이 있는 4층 회의실이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골프광이다. 집 지하에 세계 10대 골프장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그 연습실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애틀 집에 똑같은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4층 소회의실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열아홉 시간….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지”라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 사무실엔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나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 승리로 끝난 ‘오케하자마 전투’



 그렇게까지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초고속인터넷 사업은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단 2000명의 병사로 수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투다. 당시 나와 소프트뱅크의 ‘적’은 NTT였다. 규모도, 노하우도, 자금도 비교가 안 되는 회사에 맞서 일본에 진정한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NTT는 거인이다. 그래서 무겁고, 느리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몸이 가볍다. 소수 정예 결사대다. 서로를 동지라 믿고 함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듯 죽도록 노력한 결과 정말 11개월 만에 우리는 100만 가입자를 유치했다. 그 사이사이 진행된 강렬한 프로모션들도 효과가 컸다.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가정용 초고속인터넷 셋톱박스를 나눠줬다. 가당치 않게도 “가입 신청 뒤 개설까지 열흘 안에 끝내 드린다”는 ‘10영업일 집중’ 캠페인도 벌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의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려 애썼다.



 그렇게 매년 1000억엔 씩 적자를 보는 사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경쟁사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소비자들이 야후BB로 가는 걸 막는 데 치중하던 그들이 본격적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적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와 NTT는 넓은 의미에서 소비자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친구’가 된 것이다. 2004년 6월 소프트뱅크는 일본텔레콤 인수에 성공했다. 일본텔레콤은 철도선을 따라 개설된 전화 네트워크를 보유한 일본 내 주요 통신사업자다. 덕분에 야후BB의 서비스는 빠르게 안정화돼 갔다. 2005년에는 드디어 흑자 전환이 이루어졌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이베이와 야후재팬의 8년 전쟁=소프트뱅크가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야후재팬의 힘이 컸다.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와 시장의 불신 속에서도 야후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8월 시작한 인터넷경매 사업이 주요 동력이 됐다. 손정의 회장은 애초 일본 진출 예정인 세계 최대 인터넷경매 기업 이베이와 조인트벤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이베이가 일본법인이 설립되기 한 달 전 서둘러 경매사업을 시작했다. 이베이재팬이 본격 영업을 시작할 때쯤엔 이미 야후재팬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초기 야후재팬은 모든 경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직원들은 “서버 운영비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손 회장은 ‘공짜’를 고집했다. 적자 상황에서도 뚝심을 발휘해 먼저 시장 키우기에 몰두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뒤에야 조금씩 유료화를 진행했다. 일본 인터넷경매 시장은 이미 야후재팬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부턴 이베이재팬이 “수수료 무료!”를 외치며 대대적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베이는 2002년 3월 결국 일본 사이트를 폐쇄하고 철수했다. 2007년 12월, 야후재팬과 이베이는 “새 시장 창출을 위해 제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베이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택한 카드는 결국 야후재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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