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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9) 매력남 리리싼

중앙일보 2011.10.16 22:05


▲1962년 5월 네이멍구 자치구 설립 15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한 리리싼(앞줄 가운데). 왼쪽 둘째는 부총리 우란푸(烏蘭夫), 오른쪽 첫째는 극작가 라오서(老舍). 김명호 제공

매력남 리리싼, 스승의 며느리 리이춘 사로잡아



마오쩌둥의 첫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양개혜)에게 리이춘(李一純·이일순)이라는 올케가 있었다. 오빠 카이즈(開智·개지)는 마오쩌둥·차이허썬·리리싼 등 복잡하고, 개성 강한 사람들과 인연이 얽히고설키는 바람에 붉은(紅色) 연애사에 이름을 올렸다. 발단은 첫 번째 부인 리이춘이었다.



리이춘은 평생 원수가 되고도 남을 남녀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별난 재주가 있었다. 청년 시절 마오쩌둥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양카이후이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다. 리이춘이 시누이를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의 결혼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리리싼은 프랑스 유학 시절 차이허썬과 함께 멍다얼파의 영수였다. 1921년 강제 귀국과 동시에 중국공산당에 입당, 후난(湖南)성 안위안(安源)에서 철도와 광산 파업을 주도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듬해 겨울 베이징에 있던 장궈다오(張國燾·장국도)가 보낸 초청장을 받았다. “한 수 배우겠다”는 내용이었다.



리리싼은 왕년의 스승이었던 양창지(楊昌濟·양창제)의 아들 양카이즈의 집에 머무르며 북방의 당원들에게 파업경험을 전수했다. 후난으로 돌아갈 즈음 양카이즈가 “나도 고향에 내려갈 참이었다. 집사람을 먼저 보내려 한다. 흉악한 놈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라 여자 혼자 보내기가 불안하다. 창사(長沙)까지 잘 부탁한다”며 기차 안에서 먹을 것까지 한 보따리 챙겨줬다. 베이징에서 창사까지 일주일이 걸릴 때였다.



리리싼은 매력 덩어리였다. 리이춘은 넋을 잃었다. 상처(喪妻)했다는 말을 듣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기차가 이렇게 빨리 달리냐며 속으로 투덜댔다. 열차가 창사에 진입하자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안위안에 도착한 리이춘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리리싼은 양카이즈에게 큰 빚이라도 진 기분이었지만 리이춘은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여자였다. 동생 리충더(李崇德·이숭덕)를 양카이즈에게 소개시켜줬다. 둘 다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리이춘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리이춘은 중국혁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광저우(廣州)의 황포군관학교와 마오쩌둥이 설립한 농민강습소에서 강의하며 차이허썬의 부인 샹징위(向警予·향경여)의 소개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시누이였던 양카이후이와는 여전히 친한 친구였다. 양카이후이가 남편 마오쩌둥 편에 시(詩)를 보내면 리이춘도 마오를 통해 화답할 정도로 가까웠다.



1925년 가을, 중공 중앙당은 리리싼과 리이춘을 차이허썬 부부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상하이에서 펑수즈(彭述之·팽술지)와 한 차례 염문을 뿌린 샹징위는 모스크바에 오자 차이허썬과 완전히 갈라섰다. “차이허썬은 수도승 같은 사람이다. 나는 비구니가 아니다”며 몽골 출신 혁명가와 동거에 들어갔다.



차이허썬은 원래 건강이 안 좋았다. 병마가 떠날 날이 없었다. 리리싼은 리이춘에게 차이허썬을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곤 밖으로만 나돌았다. 제6차 코민테른 확대회의 참석 등 할 일이 워낙 많았다. 조만간에 혼자 소련을 떠나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귀국 후 리이춘이 모스크바에서 차이허썬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이허썬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온 리이춘은 막내동생 리충산(李崇善·이숭선)을 데리고 리리싼을 찾아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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