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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과 이별 더 아쉬워한 청춘들, 가사에선 ‘애국심’ 사라져

중앙선데이 2011.10.16 01:54 240호 10면 지면보기
‘뽀얀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고래고래 부르며 입영 전날을 보내던 풍경은 1980년대로 끝이 났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입영 노래도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아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군 입대와 관련된 대중가요를 한 편 꼽으라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이 노래를 꼽을 것이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1> 90년대 입영 노래

“1.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2.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 기적 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3.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 나팔 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전인권<사진>의 ‘이등병의 편지’, 1990, 김현성 작사·작곡)

가수를 김광석이 아니라 전인권으로 쓴 것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가? 이 노래를 가장 먼저 취입한 사람은 전인권이며, 그 시기도 90년으로 매우 이르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한겨레신문과 손잡고 주도한 ‘겨레의 노래’라는 사업에서 공모로 뽑힌 작품이었다. 상업적이어서 획일적인 대중가요와 또 다른 이유로 획일적인 투쟁적 데모 노래 양자와 모두 거리를 둔, 그야말로 겨레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좋은 노래를 모으고 찾아 공연과 음반 취입, 책자 발간 등을 하겠다는 큰 사업이었다. 김민기는 직접 옌볜 등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몇 편의 작품을 골라왔고, 월북으로 사라졌던 작곡가 김순남의 노래도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반인이 지은 좋은 노래들을 공모해 꽤 여러 편을 선정했다. 이 노래도 그 과정에서 뽑혔고 90년 음반 ‘겨레의 노래’에 전인권의 목소리로 수록됐다. 노래를 지은 김현성은 파주에서 포크 그룹 ‘종이연’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윤도현도 그 멤버 중 하나였다. 윤도현의 히트곡으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도 김현성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진보적 노래운동과 발을 맞춘 언더그라운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 두 곡을 보면 참 착한 심성을 깊은 곳에서 차분하게 드러내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입영전야’와 비교해 보면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일단 ‘나라 위해’ 같은 입에 발린 표현들이 없다. 대신 매우 당연하면서도 절절한 이야기들, 부모나 친구들과 떨어지는 섭섭함과 외로움이 강조돼 있다. 군대에서 경직돼갈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표현된다. 87년 6월 시민항쟁이 없었다면 합법 음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90년 이 훌륭한 노래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같은 해 더 막강한 노래 한 편이 군대 가는 젊은이들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 손 흔드는 사람들 속에 그댈 남겨두긴 싫어 /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 / 기다리지 말라고 한 건 미안했기 때문이야 / 그곳의 생활들이 낯설고 힘들어 / 그대를 그리워하기 전에 잠들지도 모르지만 / 어느 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 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 위로”(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1990, 박주연 작사, 윤상 작곡)

‘사랑일 뿐야’를 불러 크게 히트한 꽃미남 발라드 가수 김민우의 후속 곡으로 데뷔 곡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게다가 김민우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입대하게 되었고, 마치 현빈의 해병대 입대 때처럼 김민우 팬들이 입영 날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한 번만 딱 들어봐도 히트는 떼어놓은 당상이다 싶다. 발라드 작사의 귀재로 떠오른 박주연의 가사에 대중적이면서도 값싸 보이지 않는 윤상의 작곡이 어우러졌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입영열차 안의 짧은 한순간에 입영 전날 애인과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부터 이제부터 펼쳐질 긴긴 그리움과 고통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중요 장면들을 드라마틱하게 압축해낸 가사는 한창 달아오른 발라드 시대에 안타까운 스무 살 청춘들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에서는 ‘나라’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친구조차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 입대 이야기가 오로지 애인과의 긴 이별의 사건으로만 의미화돼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몇 년 후 발표된 이장우의 ‘훈련소 가는 길’로 이어진다.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의 빅 히트로 ‘이등병의 편지’는 민중가요 수용자들에게만 기억되는 노래로 남았다. 대중적 인기로 보자면 완패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입영열차 안에서’의 인기는 지나갔고 ‘이등병의 편지’는 부활했다. 서태지와아이들이 몰고온 댄스뮤직 시대에 자칫 죽어버릴 것 같았던 포크를 소극장 공연으로 유지하며 이어간 김광석의 음반에 리메이크로 실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를 기억하고 속으로 읊조리던 386세대들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이 노래를 살려낸 것이 정점이었다.

휴전선 공동경비구역에서 남과 북의 젊은 군인들이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이 기막힌 상황을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정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북한군 병사의 대사 “광석이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다냐?”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명대사로 남았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휴전선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 것에 대한 착잡함과 총부리를 겨누는 두 체제의 젊은이들이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나누고 있다는 반가움이 겹쳐지도록 한 절묘한 대사였다.

그러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등병의 편지’가 20년이 넘도록 살아남을 줄 짐작이나 했던가.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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