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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냄새’의 상상력, 60년대 감수성에 새바람

중앙선데이 2011.10.16 01:51 240호 9면 지면보기
젊은 시절의 작가 강신재. [중앙포토]
1960년 ‘사상계’ 1월호에 강신재의 단편소설 ‘젊은 느티나무’가 발표된 후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비누냄새’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떠돌았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는 소설의 첫머리가 일으키는 신선하고도 에로틱한 상상력 때문이다. 여고생 ‘숙희’와 대학생 ‘현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모가 재혼하는 바람에 법적으로는 남매다. 소설은 ‘행복한 결말’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사랑은 깊어만 가고 행복한 미래에의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파격적이었다. 강신재는 소설 속에서 친남매 간의 ‘근친상간’도 과감하게 다루는 등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변칙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를 즐겨 썼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2> 주부 대신 작가 택한 강신재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신재는 지금의 경기여고를 거쳐 43년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인 44년 20세 때 결혼하면서 학칙에 따라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강신재보다 두 살 위인 남편 서임수는 대구 태생으로 45년 경성대(서울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대 교수·공군본부 정훈감·국회의원·경향신문 부사장 겸 편집국장·국민대학장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쳤다. 특히 『장미도 먹을 여인』『삼천궁녀 거느리는 뜻은』등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낸 수필가로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강신재가 6년차의 주부에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데는 남편의 영향도 컸을 것 같다. 80년 한 문예지의 청탁으로 강신재를 장시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소설가가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면서 대구 시댁에 내려가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다 보니 문득 주부로서는 낙제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소설을 비롯해서 많은 책을 읽기는 했지만 감히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품지 못하다가 주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에야 소설로서 탈출구를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은 거지요. 어이없는 얘기지만 훌륭한 주부보다는 뛰어난 작가 쪽이 쉽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서울로 올라온 강신재는 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에 ‘얼굴’ ‘정순이’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데뷔작에서부터 강신재의 소설 속 여자 주인공들은 변태적이거나 불행을 감수하는 숙명적 여인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따금 그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도 하지만 작가는 따뜻한 시선과 손길로 그들을 감싸 안으면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것은 아마도 강신재 특유의 태생적 ‘페미니스트 기질’의 소산일 것이다.

나는 강신재의 그 여성스러움과 여성 편향적 기질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81년 박경리 소설가를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다. 73년 4월 그의 외동딸(김영주)과 김지하가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혼배미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박경리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뒤쪽 구석으로 가서 기둥을 부여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박경리가 돌아다보니 선배 작가 강신재였다. 강신재는 “나도 딸(피아니스트 서타옥)을 시집 보낼 때 생이별하는 것 같아 박 선생처럼 눈물을 쏟았다. 딸 시집 보내는 엄마의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며 박경리의 등을 토닥였다. 박경리는 “그때의 그 따사로운 손길과 위로의 말로 큰 감동을 받았다”며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했다.

이런 기억도 있다. 강신재는 70년대부터 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으므로 나는 꽤 자주 그를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저녁을 먹고 서울시청 앞 한 호텔의 지하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문득 강신재의 눈길이 출입문 쪽을 향하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었다. 강신재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그의 남편 서임수가 두어 명의 젊은 여성과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부부는 눈짓으로만 인사를 나누었고, 서임수 일행은 우리 자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공연히 난처해져서 그냥 자리를 떠야 하나 어째야 하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강신재가 웃으면서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우린 늘 이래요.”

지금 같으면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무렵에는 그들 부부보다 20년 가까이 젊은 내가 신기해 할 정도의 생소한 광경이었다. 남녀평등이니 여성해방이니 하는 따위의 진부한 표현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것이 강신재가 지닌 태생적 기질일 것이라 느껴졌다. 언젠가 한 평론가가 강신재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강신재는 가장 여성스러운 여류작가’라는 글을 썼을 때 강신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여성이 여성스럽다는 것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느냐”는 것이며, “작가면 작가지 왜 꼭 앞에 ‘여류’를 갖다 붙여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훌륭한 주부’보다 ‘뛰어난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스스로 여성의 속성을 떨쳐버리려 했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문체라든가, 여성의 운명이나 남녀의 다양한 애정관계 따위를 강신재의 작가적 특질로 보는 시각이 많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그 하나하나의 주제들이 역사적 현실이나 사회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가령 6·25전쟁이나 4·19혁명 같은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바탕에 깐 ‘오늘과 내일’ ‘임진강의 민들레’ ‘북위 38도선’ 같은 작품들이 좋은 예다. 그것이 강신재를 ‘여류’라는 한정사로 묶어두지 않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문학상, 여성문학상, 예술원상, 중앙문화대상 등을 수상하고 여류문학인회 회장을 맡기도 한 강신재는 2001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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