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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신해혁명 100주년에

중앙일보 2011.10.12 00:27 종합 38면 지면보기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




레닌이나 체 게바라가 그랬듯 쑨원(孫文)도 혁명활동의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망명객으로 보냈다. 1914년 그는 도쿄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고 있었다. 당시로선 최첨단업종이던 영화 산업으로 거부가 된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의 저택에 기거하며 자객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한시도 쉼 없이 혁명의 열정을 불태우던 그가 어느 날 식음을 전폐하고 열병으로 앓아 누웠다. 비서로 일하던 쑹칭링(宋慶齡)이 갑작스레 상하이로 귀국한 뒤부터였다. 눈치 빠른 우메야 부부가 냉가슴만 앓고 있던 쑨원의 의중을 떠본다. “부녀간처럼 나이 차가 큰 쑹칭링과 결혼하면 혁명은커녕 당신의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쑹칭링과 맺어진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소.” 진심을 확인한 우메야 부부는 상하이로 사람을 보내 쑨원의 뜻을 전한다. 쑹칭링은 다시 도쿄로 달려왔고 둘은 우메야의 자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27세 나이 차를 극복한 세기의 로맨스는 그렇게 성사됐다. 쑨원의 반려자 쑹칭링은 훗날 중국 부주석에 올랐다.



 쑨원이 우메야에게 진 빚은 애정 문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대가 군사를 일으키면 나는 재력으로 뒷받침하리다”(君擧兵我擧財). 우메야는 요즘 돈으로 환산해 1조 엔이 넘는 거액을 무기 구입과 비행장 건설 등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쑨원에게는 우메야 이외에도 많은 일본인 동지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 혁명활동의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머물렀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보며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피압박 민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대(大)아시아주의’로 발전한다. 하지만 일본은 말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인 ‘대동아 공영’을 꿈꾸며 대륙 침략에 나서고 있었다. 그런 일본에 쑨원은 배신감을 느꼈다. 1924년 11월 일본 고베에서 열린 생애 마지막 대중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질타한다. “일본은 서구 패도(覇道)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王道)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라.”



 엊그제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지도부가 모여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했다. 지난 100년 동안 근대의 열등생이던 중국은 모범생 일본을 추월하고 최우등생 미국에 버금가는 지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런 중국의 굴기(堀起)를 바라보는 주변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에 차 있다. 쑨원이 질타한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랬듯, 행여 오늘의 중국이 패도의 길을 가는 건 아닐까. 지하의 쑨원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00년 만에 G2로 올라선 중화민족의 부흥을 뿌듯해 할까, 아니면 중국의 패도를 걱정하고 있을까.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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