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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실리콘밸리에서 은행이 하는 일

중앙일보 2011.10.12 00:23 경제 8면 지면보기






최명주
GK파트너스 사장




1년여 만에 방문한 미국 실리콘밸리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팰로앨토의 대학가와 인근 주택가를 연결하는 지방 국도는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교통량이 붐볐다. 제2의 실리콘밸리를 지향하는 어바인 근교 산업단지를 방문하는데,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면서 약속 시간을 맞추느라 애간장을 태웠다.



 어바인에 본사를 둔 신소재 유망 벤처기업의 사장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기업의 본사는 없고 실리콘밸리은행(Silliconvalley Bank)이란 간판만 보였다. 안내 데스크에 물어보니 주소가 맞다고 했다. 다름 아닌 그 기업의 거래 은행이었다. 나는 은행 지점의 회의실로 안내돼 예정된 만남을 가졌다. 은행 측은 차와 스낵까지 제공하며 쾌적한 회의 환경을 만들어줬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에는 현지 상업은행들이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은행과 코메리카은행(Comerica Bank)이 대표적이다. 정보기술(IT)·소재·에너지 분야 등의 유망 벤처기업이 이들 은행의 주된 고객이다. 내가 만난 벤처기업 사장은 거래 은행으로부터 설비·자금을 무담보로 신용대출을 받고, 공장부지 확보를 위한 정보와 환경기준 충족에 관한 지방정부 인허가 등에 이르는 토털 컨설팅을 지원받는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은행의 리서치팀은 달랑 기술과 아이디어만 갖고 있는 벤처기업을 발굴해 사업성을 평가한 뒤 보고서를 작성한다. 은행은 이를 근거로 신용대출, 지분투자, 그리고 사무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과 벤처기업 간 공동성장, 상생의 현장이었다. 내가 방문한 기업은 고효율 전력변환용 소재와 디바이스 및 모듈을 3년째 개발해온 창업 초기의 유망 기업이다. 아직 매출은 크지 않고 수익도 변변치 않다. 하지만 전력 변환 과정에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는 첨단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할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벤처기업들이 돈과 시간에 쫓기지 않고 미래를 향한 사업에만 매진할 수 있는 것은 지역 은행이라는 믿음직한 동반자 덕분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선 금융과 산업이 아주 친한 친구, 후원자, 컨설턴트, 리스크 관리인으로서 한 몸으로 융합돼 있다. 자칫 허투루 나가지 않도록 견제·감독하는 상생 경영의 묘기도 연출된다. 페이스북이 초기 경영진 간 내분을 겪으면서까지 본사를 실리콘밸리로 옮긴 이유는 다름 아닌 이런 생태계에 둥지를 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은행들이 올 들어 9월까지 사상 최대인 10조원 이상의 순익을 올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벤처·중소기업들이 만성적인 자금난과 지원 서비스의 부족으로 좌절을 겪고 있다. 은행들이 편안한 예대마진 따먹기와 주택담보 대출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도 들린다.



정부가 공생의 생태계를 얘기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뭔가 심각한 미스매치가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압박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은행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최선의 길이다. 실리콘밸리 은행들의 사례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봤으면 한다. 어려운 벤처·중소 기업들을 돕자는 시혜적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에 한국 은행들의 미래 성장동력이 숨어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최명주 GK파트너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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