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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고미술 감별

중앙일보 2011.10.12 00:11 종합 37면 지면보기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살던 정조 무렵에 옛 그릇〔古器〕을 팔려 했으나 3년 동안이나 못 판 사람이 있었다. 온 장안을 돌아다니다 값만 떨어졌다. 그때 고미술품 감정에 능했던 여오(汝五) 서상수(徐常修:1735~1793)가 중국의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돌로 만든 필세(筆洗:붓 씻는 그릇)라면서 즉석에서 8000냥에 샀다고 연암은 『필세설(筆洗說)』에서 전한다.



 서상수는 서얼 출신이기에 관직은 종8품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지만 고미술품 감정안이 있었다. 묵은 때를 벗겨내니 가을의 연꽃 같은 자태가 드러나 장안의 명기가 되었다. 박지원은 서상수도 “집이 가난해서 수장하지 못하는 것을 일찍이 한탄했다”고 전하니 고미술품 수장(收藏)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돈이 들었다. 박지원이 근세의 고미술 감상가(鑑賞家)로 꼽은 인물은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지만 재사(才思:재주 있는 사고력)가 없어 진미(盡美)한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했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중국 고대의 그릇이나 왕희지(王羲之), 고개지(顧愷之) 등의 진적(眞蹟)이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넌 적이 있었는가?”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박지원보다 150여 년 전의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는 「중국인의 서화에 제(題)한 것은 위작이 많다〔中國人於書畵題識例多贋作〕」는 글에서 중국의 유명 작품들이 조선에도 들어왔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단 진품이 아니라 위작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위작을 안본(贋本), 또는 안작(贋作)이라고 하는데, 역대로 왕희지의 글씨와 송 휘종(徽宗)의 작품이 가장 안작이 많았다. 장유는 이 글에서 왕희지의 서찰 모음집인 『당본 십칠첩 진자 번주(唐本十七帖眞字翻註)』를 얻어 보니 책 뒤에 ‘정관(貞觀:당 태종 연호) 17년(643) 상서복야(尙書僕射) 우세남(虞世南), 한림학사(翰林學士) 저수량(褚遂良) 등이 칙명으로 관본(館本)을 모사(摹寫)한 것이다”라는 글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세남은 상서복야를 거치지 못했고, 저수량도 한림학사를 거치지 못했으니 안작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미술계가 침체를 면치 못하는 이유가 위작 의혹에도 있다는 소식이다. 이 또한 전문 감정가를 길러내지 못하는 학계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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