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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번지수 틀린 ‘이승만 낙인’

중앙일보 2011.10.05 00:29 종합 33면 지면보기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KBS가 3회에 걸쳐 방영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이승만 편’ 시리즈는 국내외 전문가를 광범하게 인터뷰하고 풍부한 영상자료를 활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지난달 30일자 마지막 회에서 시청자들에게 가장 생생하게 다가왔을 장면은 4·19 학생혁명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 일생이 막을 내리는 역사적 현장을 경험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1960년 그날 필자도 광화문으로 갔다가 중앙청 담장에 올라앉아 혁명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대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20대 청년이 70대 노년이 되는 동안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도 많이 바뀌었다. 이승만은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인물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를 4·19학생혁명의 원인에 연관 지어 ‘독재자’라는 한마디로 비판하고 독립건국, 호국에 헌신했던 일생을 평가절하하거나 매도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말 신문의 맹아기(萌芽期)에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치 개혁과 개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선각자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고,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낸 거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90년 일생은 개화, 독립, 국가수호를 위한 투쟁으로 집약된다. 그가 남긴 발자취가 워낙 크다 보니 공(功)과 허물이 교차해 논쟁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공은 덮어버리고 과(過)를 확대해 독재자로 규정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의 진통을 이해하지 못한 편협한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기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어떠했으며 오늘의 남북한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북한을 경직된 병영국가와 독재체제로 만들어 남한의 적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선동과 선전을 침략의 무기로 활용하는 호전적인 적대 세력에 대응해야 했던 이승만을 국력이 크게 신장된 오늘날의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다.



 필자도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대구매일 테러 사건(1955)과 경향신문 폐간 사건(1959)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정책을 수립해 언론을 통제했다기보다는 ‘반공’이라는 당시에 가장 시급하면서도 편리한 정책을 언론에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언론통제의 법적·제도적 장치는 제3 공화국 이후의 역대 정권이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가장 최근에는 노무현 정부가 강행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은 언론 관련 법 제정과 이른바 지원정책 같은 기구가 그것이었다.



 이승만 집권 후반기였던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당지(與黨紙)를 압도하는 야당지(野黨紙)가 있었다.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과 강력한 야당이 존재하는 정치상황이었다. 학생혁명의 원동력은 언론과 야당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신문은 투표 부정을 폭로하고 부정선거를 고발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집권 시기는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재국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KBS의 3회분 시리즈는 고심 끝에 방영이 결정된 프로그램이었다.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제헌국회의 초대 의장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인물을 뒤늦게, 그것도 어렵사리 특집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만시지탄은 있지만 나라의 기간방송 KBS의 올바른 선택이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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