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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⑪ 난징(南京)

중앙일보 2011.10.05 00:24 경제 14면 지면보기



용·호랑이 웅크린 풍수 … 역사를 호령했던 10개 정권 수도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현재 중국의 도시 가운데 이름에 ‘수도 경(京)’자가 들어가는 곳은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 두 곳뿐이다. 남쪽의 수도 난징은 ‘육조고도(六朝古都)’로 불린다. 동오(東吳), 동진(東晋), 남북조시대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남당(南唐), 주원장(朱元璋)의 명(明), 태평천국, 중화민국까지 난징은 모두 10개 정권의 수도였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마오쩌둥과 진시황의 난징











“종산에 비바람 거대하게 일어나니(鍾山風雨起蒼黄),



백만 정예군대가 창장을 건넜다(百萬雄師過大江).



호랑이와 용이 웅크린 난징에는 승리뿐(虎踞龍盤今勝昔),



하늘과 땅이 뒤집히니 어찌 강개하지 않겠는가(天飜地覆慨而慷).



남은 병사로 궁지에 몰린 적을 끝까지 쫓아야지(宜將剩勇追窮寇),



명성 얻으려다 실패한 패왕 항우의 전철은 밟지 않으리(不可沽名學覇王).



하늘에 정이 있다면 하늘 역시 늙겠지만(天若有情天亦老),



인간의 바른 길은 상전벽해처럼 변화무쌍하네(人間正道是滄桑).”









난징(南京)은 창장(長江)을 끼고 내려온 중국 남부와 중부의 대산맥이 꼬리를 감추는 왕기가 서린 명당이다. 사진은 중국 자체 기술로 1968년 준공한 길이 6772m의 난징 창장대교와 자금산(紫金山). [중앙포토]






1949년 4월23일 류보청(劉伯承·유백승)과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군대가 난징 공략에 성공했다는 승전보를 들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지은 ‘인민해방군이 난징을 점령하다(人民解放軍占領南京)’란 시다. 도강전역(渡江戰役)의 주역 제2야전사에 보낸 승리의 축하 선물이었다. 이날의 승리로 마오쩌둥은 조조(曹操)와 부견(苻堅)을 넘어선 인물이 됐다. 위(魏)나라 조조는 208년 적벽대전에서 패배해 천하통일의 꿈을 접어야 했고,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우리에게 익숙한 전진(前秦)의 부견도 383년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져 남북통합에 실패했다. 도강전역에서 15만 군사를 잃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타이완으로 쓸쓸히 패퇴했다.



마오가 쟁취하기 2000여 년 전 난징은 진시황(秦始皇)의 심기를 건드린 불온의 땅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에게 예언가들이 “오백 년 뒤 금릉(金陵·난징의 당시 이름)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경고했다. 천하 순행에 나선 진시황은 난징 남쪽 지금의 팡산(方山)에 올랐다. 술사들이 천자의 기운이 이곳에서 솟아난다고 말했다. 노한 진시황은 지맥에 혈(穴)을 뚫고 구릉을 절단해 용의 기운을 차단했다. 강물까지 거꾸로 흐르게 만들었으니 지금의 진회하(秦淮河)가 이때 생겼다. 그는 BC 210년 금릉이란 이름도 말릉(秣陵·여물 언덕)으로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진시황의 노력도 예언을 바꾸진 못했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에서 황제에 등극한 뒤 왕기가 깃든 말릉을 건업(建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도읍을 옮겼다. 진시황 순행 500여 년이 지나 난징 땅에서 예언대로 황제가 나온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난징을 찾은 촉(蜀)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종산(鐘山)에 용이 서려 있고, 석두산(石頭山)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으니 실로 제왕이 자리 잡을 땅”이라며 이곳의 풍수를 극찬했다.



진시황의 저주 역시 강했다. 용맥의 기세가 진시황의 기세에 눌렸는지 난징을 수도로 삼은 역대 왕조는 모두 단명하고 만다.









자금산에는 오나라 손권, 명 태조 주원장, 중화민국의 쑨중산의 능이 있다. 사진은 쑨중산의 중산릉.







명 태조 주원장의 난징



로마제국의 로마, 대영제국의 런던과 같은 대표 도시가 중국의 역사에는 없다. 한 도시가 감당하기에 정치, 문화의 규모와 역사의 길이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근대 절대왕정 국가들이 중세 도시국가 체제를 단일 메트로폴리스로 대체하면서 성립됐던 것과 달리 천자(天子)가 다스리던 중국의 절대왕정은 하나의 거대 도시에 의존하지 않았다. 군현제란 특유의 중앙집권체제로 제국을 하나의 정치체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난징은 진·한(漢)·당(唐) 제국의 수도 시안(西安), 원(元)·명·청(淸)의 베이징과 다른 풍격을 갖춘 수도였다.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면서 북방의 이민족을 피해 내려온 한(漢)족들은 남조(南朝)의 수도 난징에서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북에서 내려온 통일군주 수(隋) 문제(文帝)는 난징을 점령한 뒤 모두 불태워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당·송(宋)대 난징은 경제적으로 쇠락했지만 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의 중심지였다.



“산은 옛 도읍을 에워싸고 성곽은 남아 있는데(山圍故國周遭在)/ 조수가 텅 빈 성으로 밀려오니 적막이 감돈다(潮打空城寂寞回)/ 회수 동쪽에 옛적 달이 떠올라(淮水東邊舊時月)/ 밤 깊어 성의 담장을 넘는구나(夜深還過女墻來)”라는 유우석(劉禹錫)의 시 석두성(石頭城), “남조 때 지은 사백팔십 사찰엔(南朝四百八十寺)/ 수많은 누대들이 이슬비에 젖는구나(多小樓臺煙雨中)“라고 읊은 두목(杜牧)의 ‘강남춘(江南春)’ 등이 모두 난징 일대의 옛 영화를 노래한 한시다.



세월이 흘러 1368년 정월, 거지와 승려를 전전하다 홍건적의 우두머리가 된 주원장이 근거지였던 응천(應天)을 난징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명(大明)제국을 세웠다. 난징이란 이름의 시작이다. 북방의 사막으로 물러난 몽골족은 여전히 북원(北元)이라 칭하며 호시탐탐 남하를 획책하고 있었다. 안보와 경제 사이에서 고심하던 주원장은 즉위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난징을 수도로 확정한다.









매년 난징의 공자 사당인 부자묘(夫子廟) 일대에서 열리는 등 축제 ‘진회등회(秦淮燈會)’에 참가한 오색찬란한 중국식 등.



“현재 난징은 천연의 해자인 창장(長江)과 접해 있어 지세가 험하며, 강남의 형세가 아름다운 곳이니 실로 나라를 세우기에 족하다. (짐의 고향인) 임호(臨濠·현 안후이성 펑양)는 앞으로 창장이 있고 뒤로는 화이허(淮河)가 있어 험요함이 믿을 만하고, 수로를 통해 조운이 가능하니 짐은 중도(中都)로 삼기를 원한다.” 이렇게 신하들의 동의를 얻은 주원장은 수도 건축의 규범에 맞춰 난징에 거대한 도성을 조성할 것을 명령했다. 1378년 정월, 난징은 경사(京師)로 이름을 바꾼다. 난징의 시대는 짧았다. 큰조카의 황위 계승에 반발한 주원장의 4남 주체(朱棣)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제위 찬탈에 성공한 영락제는 1403년 자신의 아지트인 베이핑(北平)을 베이징으로 이름을 바꾼 뒤 도성 건축이 완료된 1420년 천도했다.



명초 난징의 성곽은 20여 년에 걸쳐 축성됐다. 내성 성곽의 둘레는 약 35.267㎞였다. 지금도 25.091㎞가 남아 있다. 내성에는 성문이 13개, 1만3000여 개의 총안(銃眼)을 만들었다. 중국에 현존하는 도성 중 가장 길다.



1595년 난징에 처음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이 도시(난징)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에서 세계의 모든 도시를 능가한다. 말 그대로 궁전과 사당, 탑, 다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을 뛰어넘을 만한 건축들은 유럽에 없다”고 극찬했다. 1600년 베이징을 다녀온 뒤 남긴 기록에서도 “도시(베이징)의 규모, 건축 계획, 공공 건물과 성벽의 구조가 난징의 그것만 못하다”고 평가했다. 1400년 기준으로 난징의 인구는 48만7000여명.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다.



주원장은 난징의 동쪽에 보랏빛 자태를 뽐내는 자금산(紫金山·일명 종산·鍾山)에 자신의 능을 조성했다. 명효릉(明孝陵)이다. 효릉 앞에는 삼국지의 영웅 손권의 묘가 남아 있다. 중국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중산(孫中山·손중산)의 거대한 중산릉은 명효릉 뒤 산 중턱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중국식 민주의 시험장 난징



난징 동쪽으로 펼쳐지는 창장삼각주는 대도시들이 밀집한 중국의 거대한 메갈로폴리스 지대다. 그중 상하이(上海)가 대외 경제 중심 도시라면 난징은 경제와 정치를 양수겸장한 도시다. 중국의 막강 파워 기구인 공산당 조직부의 수장 리위안차오(李源潮·이원조·61)가 정치적 도약의 기반을 닦은 곳이 바로 난징이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의 복심인 그는 2001년11월 난징시 당서기에 취임했다. ‘녹색 난징’ ‘서비스형 정부’를 제창해 민심을 얻은 뒤 난징을 민주화의 시험장으로 변모시켰다. 난징 시정부가 관할하는 806개 농촌지역과 363개 도시지역의 기층 간부들을 공동 추천, 직접 선거를 의미하는 ‘공추직선(公推直選)’을 통해 선발했다. 지금까지 실험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난징발 민주 실험이 중국을 다시 한번 바꾸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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