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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태초에 푸틴이 있었어라

중앙일보 2011.10.05 00:01 종합 35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태초에 푸틴이 있었어라.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부르지 못했더라. 그가 보기에 힘 있는 사람이 좋아 보였더라. KGB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더라.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국제법을 공부하면 KGB에 들어가는 데 유리하다고 했더라. 그래서 국제법을 공부하매, 바라는 대로 KGB에 들어갈 수 있었더라. 그곳에서 15년을 기다려 수장 자리에 올랐더라.



 때마침 세상이 혼란스럽더라. 알코올 중독자가 탱크 위에 올라 지도자가 되었더라. 그가 보기에 힘 있는 사람이 좋아 보였더라. 알코올 중독자 밑에 엎드려 때를 기다렸나니, 알코올 중독자가 그를 가까이하여 이인자 자리에 앉혔더라. 알코올 중독자가 더 이상 술을 이겨내지 못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더라. 그가 그 자리를 대신하매 모든 힘이 그에게 몰렸더라. 그가 보기에 참으로 좋더라.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더라.



 모든 힘이 그에게 몰리매 만사를 뜻대로 해도 되었으나, 그는 율법을 망가뜨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라. 그게 더 보기에 좋았더라. 이윽고 율법에 따라 지도자 자리에 오르더라. 네 해가 지나고도 다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더라. 그가 보기에 참으로 좋더라.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더라. 그가 지도자 자리에 오를 때 그의 땅은 파산 직전에 있었더라. 그가 보기에 그것은 좋지 않았더라. 그리하여 그가 가라사대, “유가는 치솟으라” 말했더라. 그러자 그가 말하는 대로 됐더라. 그가 대통령 자리에 있던 여덟 해 동안 주가지수는 열두 배, 외환보유액은 열 배, 국내총생산(GDP)은 네 배, 수출은 세 배나 늘었더라. 모두 그의 뜻대로 유가가 오른 덕분이었더라. 눈물 젖은 초코파이를 먹던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더라. 백성 열 명 중 일고여덟 명이 그를 좋아했더라.



 그의 롤모델은 놀랍게도 대한민국 땅에 있었더라. 다름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더라. 박정희에 대한 책은 어떤 나라 말로 쓰였건 모두 구해서 읽었더라. 경제계획에 대한 모든 모델이 거기서 나왔더라. 강력한 카리스마로 과단성 있게 밀어붙이는 행동도 마찬가지더라. 거룩한 뜻 모르고 비판하는 인사들과 언론에 가차없는 철퇴와 재갈을 선사하는 것도 다 거기서 배웠더라.



 그래서 백성들은 그가 율법을 고쳐 세 번 연이어 지도자 자리에 머물 줄 알았더라.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이인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이인자 자리로 물러났더라. 그렇게 하는 게 더 보기 좋았더라. 그리고 네 해가 더 흘러 그가 다시 크렘린궁에 다시 들어가려 하더라. 그것도 율법에 맞는 일이더라. 율법에 따르면 열두 해를 더 지도자 자리에 앉을 수 있더라. 그러면 모두 합해 스무 해가 되더라. 그의 롤모델과 선임자 브레즈네프의 열여덟 해 장기 집권 기록을 넘어서더라.



 브레즈네프는 술 때문에 몸을 망쳤고, 롤모델은 수하의 총에 생을 마쳤더라.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 말이 많더라. 하지만 그가 어떤 길을 따르게 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지라.



이훈범 j 에디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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