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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세계는 비제로섬 게임

중앙일보 2011.09.28 00:18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
지식에디터




우리나라 양대 종교인 불교·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통 ‘불교 신자’ ‘기독교 신자’라고 칭한다. 굳이 ‘대승불교 신자’ ‘삼위일체 기독교(Trinitarian Christianity) 신자’라고 하지 않는다. 소수이지만 소승불교,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비삼위일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불교·기독교 신자들은 이들과 자신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단이나 종파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을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관음종 신자, 장로교·감리교·침례교 신자라고 하는 경우보다는 불교 신자,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충분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모든 말에는 맥락이 있다. 맥락은 구체성이 없어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해준다. 맥락 속에는 누가 다수이거나 주류인지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다. 개신교 국가의 언어 생활에서 기독교는 곧 개신교를 의미한다. 가톨릭 국가에서 기독교는 곧 천주교다.



 기독교·불교와 같은 총칭(總稱)에는 힘이 있다. ‘나는 장로교·조계종 신자’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는 크리스천·불자’라고 할 때가 더 강력하다. 더 나아가 ‘나는 종교인·신앙인이다’라고 할 때 다른 종교인이나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뭉클하게 하는 힘이 나올 수 있다.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총칭의 논리가 적용된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경우를 보자. 민주주의라는 총칭을 사용할 수도 있고 수식어를 붙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 앞에 수식어를 붙이자면 끝이 없다. 경제·사회·산업·시장·의회·입헌·전자·직접 등등… 자유민주주의가 주류·다수인 나라에서는 국가 이념을 말할 때 그저 민주주의라고 하면 된다. 필요한 경우에만 자유민주주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다.



 세계 자유민주주의의 리더 국가인 미국에서도 그저 민주주의라고 하지 자유민주주의라고 꼭 집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도 민주주의는 곧 자유민주주의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미국·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이념적으로 다수이자 주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소수인 그들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총칭의 용법이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한국은 민주 국가다’라고 할 때 더 큰 수사적 힘이 구현된다. 수사의 원칙에 따르면 짧은 말이 긴말보다 강하다. 명사·동사에 부사·형용사를 안 붙이는 게 더 좋다.



 총칭에 보편성이 담겨 있다. 보편적인 게 아닌데도 총칭을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것은 보편에 가깝다. 보편 대접을 받는 특수인 것이다. 총칭은 포괄적이다. 다른 특수를 거느린다.



 총칭 사용권은 역사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억만금을 들여 캠페인을 해도 총칭을 차지할 수 없다. 총칭은 기득권·특권이다. 기득권·특권에는 부정적인 뜻도 담겨 있지만 많은 좋은 일도 도모할 수 있다. 세상 속에서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끊임 없이 교차한다. 통일성에도 힘이 있고, 다양성에도 힘이 있다. 총칭을 사용할 수 있는 세력은 통일성을 주도하는 한편, 다양성에서 힘을 뽑아 쓸 수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더 큰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확장해야 한다. 국내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국내에서 다른 소수·비주류 이념과 제로섬(zero-sum) 게임을 하는 것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전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는 비제로섬 게임(non- zero-sum game)의 세상이다.



 권위주의가 붕괴한 나라들은 미국·프랑스·영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탐냈다. 언젠가는 한국 자유민주주의를 본받으려 하는 나라들이 나올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총칭을 사수해야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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