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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베일리가 손댄 지 10년, 버버리 근엄을 벗다

중앙일보 2011.09.28 00:07 경제 18면 지면보기
패션계에도 구원 투수가 있다. 침체된 브랜드의 명성을 되살리는 이들이다. 영국 대표 브랜드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 크리스토퍼 베일리(39)도 그중 하나. 그는 2001년 ‘버버리를 개혁하라’라는 주문을 받고 수석디자이너로 입성했다. 당시 버버리는 빨강·검정 선이 교차된 체크 무늬의 트렌치 코트를 넘어서지 못하는 정체기였다. 스물아홉의 그는 경력도 도나 카란·구찌에서 일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돌파구는 남달랐다. ‘버버리 프로섬’이라는 새 라인을 내세워 브랜드의 전통인 트렌치 코트를 버리지 않되 변주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매출은 급성장했고, 버버리는 젊고 활력 있는 이미지로 재탄생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패션쇼 라이브 중계는 물론 유튜브· 페이스북·트위터 등을 이용한 ‘디지털 버버리’로의 변신을 또 한 번 꿈꾼다. 다음 행보는 뭘까. 2012년 봄·여름 컬렉션을 막 끝낸 베일리를 20일(현지시간) 런던 본사에서 만났다.



런던=이도은 기자 사진=버버리 제공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2009년 수석 디자이너에서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로 승진했다. 버버리 컬렉션은 물론 모든 광고 캠페인, 매장 디자인, 멀티미디어 컨텐트 등을 포함한 회사의 이미지까지 그의 손에 달렸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게 즐길 뿐”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처음 버버리에 왔을 때는 부담스럽지 않았나.



“전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탄탄한 이야기와 역사가 있으니 잠재력이 충분했다.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전통의 축을 찾아내고, 그 기반에서 가지를 뻗어내는 일이었다. 일단 트렌치 코트를 핵심으로 잡았다. 워낙 브랜드의 대표 상품인 데다 시간과 성별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그래서 컬렉션마다 다양한 트렌치 코트를 변주해냈다. 내 디자인의 핵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혁명(revolution)이 아닌 진화(evolution)다.”



-과거의 전통을 현재의 트렌드로 바꾸는 비결은.



“다시 트렌치 코트를 예로 들겠다. 전통적인 디자인은 각지고 품도 넉넉하다. 나는 이를 허리선이 들어가고 주름이 잡힌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바꿨다. 하지만 옷만 바꾼 게 아니다. ‘여성적인 트렌치 코트’를 컨셉트로 잡았을 땐 포장지, 매장 전시, 광고 필름 하나까지 일관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제 디자이너는 옷만 만들어선 안 된다. 아주 사소한 단계 하나하나까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장인 정신’을 컨셉트로 삼은 2012 버버리 봄·여름 컬렉션. 아프리카를 연상시키는 프린트(왼쪽)와 여성스러운 트렌치 코트를 선보였다.



-이번 시즌엔 체크나 트렌치 코트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숨겨진 전통을 내세웠다. 바로 장인정신이다. 트렌치 코트 제작에 필요한 수작업 역시 우리의 전통이라서다. 언젠가 공장에서 장인들의 손길을 봤을 때 그 자체가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컬렉션에선 격자 짜기·레이스 등 수작업이 많이 필요한 소재와 디자인을 택했다. 또 느리고 시간이 많이 들어간 옷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사회의 바쁜 일상과 대조시키고 싶었다.”



-어느 명품 브랜드보다 페이스북·트위터 운영에 적극적이다.



“나는 종종 버버리를 두고 ‘올드 영 컴퍼니(old young company)’라고 말한다. 오래된 회사에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다. 마흔에 가까운 나만 해도 집에서는 신문을 보고 회사 오면 온라인으로 뉴스를 보지만 우리 팀원들은 다르다. 하루 종일 메일·페이스북·트위터 등 온라인에만 접속한다. 패션이든 뭐든 시대에 맞춰 가는 게 맞다.”



-명품의 희소성과 누구나 접속하는 디지털 환경은 모순되는데.



“이제 명품이 독점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패션이란 배타가 아닌 포용이다. 내가 런던 고급 쇼핑가인 본드 거리에 가게를 냈다고 치자. 그렇다고 지나가는 이들을 가려 받거나 내칠 순 없다. 그 길이 바로 디지털이다. 명품의 가치는 이제 철저히 고객의 결정을 따른다. 그렇다면 최대한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쇼핑은 돈만 내는 일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감성을 함께 즐길 줄 아는 놀이 아닐까.”



-실제 온라인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받나.



“물론이다. 세상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나로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한다. 우리의 유튜브·트위터·페이스북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 특히 ‘아트오프더트렌치(www.artofthetrench.com)’는 즐겨 가는 사이트다. 트렌치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자기 사진을 올려 공유하는 곳인데,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매일 그 모든 사진들을 본다. 하나하나 혼자서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올해는 로열 웨딩, 내년에는 런던 올림픽 등으로 최근 영국 브랜드들이 관심을 모은다. 영국 패션의 특징은 뭔가.



“대개 클래식·정통성 혹은 펑키함을 말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영국적인 패션은 ‘불완전한 엘레강스’다. 언뜻 보면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이지만 뭔가 빠진 듯해 보인다고나 할까. 거기에 위트와 새로움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10년간 많은 성과가 있었다. 버버리에서 더 보여줄 것이 남았나.



“내가 떠날 거라 여기는 이가 많지만 여기서 할 일이 많다. 이달 초 패션위크를 앞두고 ‘보디(body)’라는 향수를 만든 것도 한 가지 예가 되겠다. 옷이 아닌 향으로, 트렌치 코트 다음의 브랜드 아이콘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또 명품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재미난 공간을 개발해 내는 것도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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