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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한성부윤

중앙일보 2011.09.26 00:26 종합 33면 지면보기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 윤(漢城府尹)은 정2품으로서 다른 도의 관찰사(종2품)보다 한 등급 높았다. 최초의 한성부 윤은 태조 4년(1395) 6월 13일 임명된 정신의(鄭臣義)였다. 정신의의 이후 행로는 순탄치 못해서 그해 10월 명나라 사신 일행으로 남경(南京)에 갔다가 국서에 “명나라를 모멸하는 문구가 있다”는 ‘표전문 사건’에 연루되어 이듬해 11월까지 구류되었다. 귀국 후에도 태조 7년(1398)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 일파로 몰려 영해진(寧海鎭: 경상도 영덕)에 유배되었다. 복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초대 한성부 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서울은 계속 발전해서 세종 6년(1424) 4월 한성부는 “도성 내에 인구는 많지만 땅은 비좁아〔人多地窄〕” 집터를 둘러싼 분쟁이 심하다고 보고했다. 한성부의 인구는 성 안과 성 밖 10리를 의미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를 뜻하는데, 『세종실록』 17년(1435) 7월 10일자에 따르면 ‘한성부에 적(籍)을 둔 호구(戶口)는 도성 안이 1만9552이고, 성저십리(城底十里)가 2339’로서 도합 2만1864였다. 이는 개인이 아니라 호수(戶數: 가구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자는 한성부의 호수(戶數)는 2만4800 호(戶)에 남자 9만8713명, 여자 9만3441명으로서 도합 19만2154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 당시 20만이면 세계적으로도 큰 도시에 속했다.



 세종 6년(1424) 한성부는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戶曹)가 상의해 택지를 조성해 집 없는 사람에게 주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렇게 형성된 주택지가 동대문 근처의 숭신방(崇信坊)·창인방(昌仁坊) 등이다. 집터를 무료로 나누어 주니 터만 받고 집은 짓지 않는 얌체족이 생겼다. 다른 사람이 집을 지으려면 자신의 땅이라고 밀어냈다. 그래서 세종 11년(1429) 3월 한성부는 택지를 받은 후 3개월 내에 집을 짓지 않으면 집 지을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부랴부랴 집 짓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리라.



 한성부의 복지정책도 지금 못지않았다. 세종 8년(1426) 7월에는 성내에 친족도 없이 구걸하는 24명에게 매일 지미(支米: 정규적으로 주는 쌀) 1되씩을 주었다. 서울시장 후보 선출 열풍이 한창이다. 서울시장을 대권(大權)의 징검다리로 여겨 시정의 속살을 만신창이로 만들 인물만은 삼가줬으면 좋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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