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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한쪽만 편드는 야구중계 당신도 열광하시나요?

중앙일보 2011.09.26 00:21 종합 35면 지면보기








‘루빈의 꽃병(Rubin’s vase)’이란 게 있다. 덴마크의 행태주의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고안한 그림이다. 보기에 따라 꽃병이 되기도 하고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선으로 나뉜 흑백의 두 영역 중 무엇을 형태로 보고 무엇을 배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우리가 어떤 형태를 보는 과정은 이처럼 일종의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 편가르기라는 것이 루빈의 주장이다. 꽃병이나 사람 얼굴 중 어느 하나를 볼 수 있을 뿐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요즘 이 같은 루빈의 꽃병을 마이크 삼아 방송하는 ‘편파’ 스포츠 중계가 대단한 인기란다. 한 인터넷 TV의 프로야구 중계가 그렇다. 상대팀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해설을 한다. 영상까지도 자기 팀 선수들 위주로 보여준다. 물론 시청자들은 초기 화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팀의 중계를 고를 수 있다.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내는 멋진 수비가 나왔을 때 양쪽 중계의 해설이 완전히 다르다. “네, 머리가 나쁘면 저런 수비 못합니다. 공이 어느 쪽으로 올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저렇게 무리하게 수비를 하다가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어요. 그러면 자기만 손해죠. 야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



 같은 경기를 팬들의 입맛에 맞춰 해설하니 인기폭발이다. 선수들과 해설자, 시청자가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아쉬워한다. 설령 지더라도 스트레스가 절반이다. 똘똘 뭉쳐 상대에 대한 험담과 저주(?)를 마음껏 쏟아놓았으니 남을 것도 없다.



 “타자는 몸 쪽 공을 노려야 합니다. 투수는 바깥 쪽으로 승부해야죠” 따위의 맥 빠지는 공정, 중립에 익숙한 눈과 귀에는 ‘우리 편’ 중계가 신선하고 또한 신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남는 건 그런 편파성에 대한 열광이 소통 부재 사회의 후유증이자 그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병원균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어서다.



 나와 닮은 무리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그것은 곧 나와 견해나 이해가 같은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칸막이주의로 이어진다. 이제 내가 속한 집단의 이해가 다른 집단의 이해보다 중시돼야 한다는 사회적 본능이 생긴다. 그것은 또한 다른 집단과 그 구성원을 경멸하는 패거리주의로 발전하고야 만다. 인간의 본성이 이럴진대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소비하는 일대일 맞춤의 ‘스마트 세상’과 만났으니 또 어떤 괴물을 만들어낼지 걱정스럽다.



 루빈의 꽃병에서 회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흑과 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걸 선택하든 나머지가 있기에 그림이 되는 것이다. 흑백 모두를 봐야 꽃병이든 사람 얼굴이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 바꿔볼 수 있는 게 인간의 이성이다. 매사에 우리 편만 본다면 상대 없이 하는 야구 경기와 다를 게 없잖겠나. 그런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음 한켠에 루빈의 꽃병 하나를 놓아두면 어떨는지.



이훈범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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