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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성범죄

중앙일보 2011.09.23 00:23 종합 33면 지면보기








성종 4년(1473) 풍덕(豐德)의 향교(鄕校) 학생 김존(金存)이 은삼(銀三)의 처 막비(莫非)를 강간했다. 그 전인 세종 8년(1426) 11월에는 평해(平海)의 김잉읍화(金仍邑火)는 여덟 살짜리 여아(女兒)를 강간했다. 이 경우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둘 다 목을 매다는 교형(絞刑)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함께 법전 구실을 하던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에는 ‘범간(犯奸)’ 조항이 따로 독립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강간한 자는 교형”이었다. 서로 합의한 화간(和姦)은 장(杖) 80대인데, 남편이 있으면 90대로 올라갔다. 조간(刁奸)은 남을 꾀어 간음(姦淫)하는 것으로, 주로 남성에게 해당하는데 장 100대였다. 『대명률』 ‘범간’ 조항은 ‘화간(和姦)이나 조간(刁姦)한 자는 남녀가 같은 죄’라고 해서 여성만 중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강간하거나 꾀어서 성폭행했을 경우 더 강하게 처벌했다. 12세 이하 어린 여아를 강간했을 경우는 화간이라 하더라도 강간과 같이 논죄했다.



 개국 초인 태조 7년(1398) 윤5월 잉읍금(芿邑金)이 11세 여아를 강간한 죄로 교형(絞刑) 당한 것처럼 어린아이 성폭행은 사형이었다. 강간 미수자는 장 1백 대에 삼천리 유배였다. 영조 13년(1737) 창녕(昌寧)의 문옥이(文玉伊)는 팔촌(八寸) 문중갑(文仲甲)이 음란한 행위를 하려 하자 동성(同姓)이라고 꾸짖고 모면했지만 돌아와서 음독자살했다. 강간 미수에 해당하지만 영조는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감사도배(減死島配:사형을 감해 섬으로 유배 보내는 것)’에 처했다. 매춘업자도 강하게 처벌했다. 성종 3년(1472) 7월 10일 성범죄에 관한 ‘형조수교(刑曹受敎)’가 반포되는데, 여기에 사비(私婢:여종)의 주인이 여종의 성매매를 묵인하고 화대(花代)를 챙기면 그 주인을 엄하게 논죄하고 그 여종은 잔읍(殘邑:변방)의 관비(官婢)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또한 모든 매춘업자[色人]들은 범인과 같은 죄로 다루고 매춘으로 번 모든 재리(財利)는 관(官)에 몰수한다는 규정도 있다.



 성폭력사범이 3년 새 30% 이상 증가했고, 초·중·고교의 교내 성폭력 사건도 3년간 2배 급증했다는 소식이다. 성폭력사범에 대한 처벌이 강해졌다지만 아직도 정직 등의 가벼운 처분을 받은 성폭력교사가 다시 교직에 복귀할 수 있다는 소식도 있다. 약자 보호에 초점을 두었던 선조들의 법 정신을 다시 생각해볼 때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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