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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동소문동 거리가 편한 까닭

중앙일보 2011.09.22 00:30 종합 33면 지면보기






김기택
시인




성신여대입구역에서 혜화로터리로 향하는 동소문동 거리를 자주 지나다닌다. 이 길을 지나갈 때는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옆 동네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뒤늦게 건물에 붙은 간판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이 거리의 간판은 다른 거리에 비해 크기가 절반도 안 돼 귀엽고 편안하다. 한 가게에 간판 한 개씩만 붙어 있어 여유가 있다. 간판이 작거나 적어도 상점을 찾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작은 간판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동안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큰 간판들에 적잖이 시달렸나 보다. 대형 간판들은 정말 이래도 사지 않을 거냐고, 당신이 안 사고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인상을 찌푸리고 삿대질을 하고 멱살을 잡으며 소리 지르는 것 같다. 그뿐인가. 전면 간판과 측면 간판, 돌출 간판, 입간판에다 네온사인, 현수막, 선팅, 포스터까지 건물 전체가 행인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느라 요란하다. 거의 발악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안 쳐다보려야 도저히 안 쳐다볼 수가 없다. 그 간판들은 내 몸에 말을 강제로 주입시켜 기억하게 하는 것 같다. 너무 익숙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안으로는 간판의 으름장에 위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에 덕지덕지 붙은 간판들이 흉하고 지저분해서 외국인들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창피한 느낌만 있었지, 내가 그 횡포에 이토록 휘둘렸다는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거리를 걸으면 발과 심장과 호흡이 한 박자로 움직이면서 삶의 긴장에서 조금이라도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간판과 광고로 무의식중에 이렇게 마음이 시달렸다면 내 마음은 여유가 줄어들고 자기도 모르게 공격적이 되며 성질에 모가 났을 것이다. 버스와 전철을 타도 온갖 광고에 노출되어 마음이 쉬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다 사람들과 사소한 시비가 생기기라도 하면 양보하는 경우를 보기 드물다. 아주 작은 손해라도 절대 보지 않겠다고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두르고 대하는 사람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운전대를 잡으면 시간이 많아도 습관적으로 속도를 내게 된다.



 요즘은 ‘스펙’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취업 경쟁에서 이기려면 자신을 직장에서 쓰고 싶은 가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학교, 학점, 토익 점수, 자격증은 기본이고 자원 봉사나 공모전 수상, 외국 유학이나 연수 같은 다양한 경력도 관리해야 한다. 그래도 부족해서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외모도 ‘만든다’. 지나갈 길목은 좁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으니 남들을 밀쳐낼 힘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개발해야 할 젊은이들이 상품 디자인이나 포장처럼 겉모습 보여주기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대형 간판이 판매자가 구매자를 향한 호객행위라면 스펙은 고용인이 사용자에게 보여주는 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는 속도가 걸음의 즐거움을 대신하고,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시선을 빼앗고, 입은 통화하느라 바쁘고, 사람들 사이는 경쟁이 차지하고, 휴식조차 간판과 광고에게 내주어야 하는 세상이다. 어수룩하고 느리고 바보처럼 착하고 심심한 것들이 지닌 가치가 이제는 달리 보인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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