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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55> 우리 역사 속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일보 2011.09.22 00:07 경제 14면 지면보기



일제에 항거 이범진이 자결한 도시 … 스탈린 땐 ‘부르주아 반동 도시’ 낙인





발트해 핀란드만 동쪽 끝 네바강 하구에 위치한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 수도였던 곳. 러시아의 서유럽 창구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국 역사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올해는 이범진 주러시아 초대 공사가 대한제국 멸망 소식을 듣고 자결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달 29~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에서 이범진의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을 주요 인물 4명을 키워드로 삼아 정리해 봤다.



배영대 기자











8월 29~3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에서 초대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러시아 학생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민영환









민영환



1897년 대한제국의 민영환(1861~1905) 특사 일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민영환이 남긴 보고서가 『해천추범(海天秋帆)』이란 책으로 전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적극 모색했다. 조선 말기 최고위급 엘리트 관료였던 민영환은 그러한 고종의 명을 받고 특파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최대 도시로 건설한 인물은 표트르 1세(1672~1725)다. 러시아의 서유럽식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 개혁군주로 평가 받으며 흔히 표트르 대제로 불린다. 100여 년 전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였던 조국을 떠나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 땅을 밟은 민영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민영환의 보고서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대피득(大彼得: 표트르 대제의 한문 표기)은 서력 1672년에 나서 나이 25세에 즉위했는데 당시 아라사국(我羅斯國: 러시아)은 개화되지 않았고 나라 안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부강할 것을 도모하여 미천한 복장으로 구라파(歐羅巴: 유럽) 여러 나라에 가서 여러 가지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혔다. 비밀히 선창(船廠: 배 만드는 조선소)에 들어가 스스로 목수라 일컫고 배 만들고 운전하는 갖가지 법을 부지런히 배우고 또 영국에 들어가 정치를 연구하고 돌아왔다.”



달력, 연도, 군대 등을 서유럽식으로 개편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새로운 러시아의 중심으로 건설해낸 표트르 대제의 전략을 조국이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민영환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민영환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1905)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도 단절된다.



이범진









이범진



민영환은 대한제국 공사 신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지만, 그땐 공사가 상주하는 공관도 없었고, 외교 신임장 작성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명실상부한 최초의 주러 상주 대한제국 공사는 이범진으로 간주된다. 이범진은 1901년 3월 12일 주러 공사로 임명돼 1911년 1월 26일 자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다. 이범진이 사무실로 쓰던 건물과 그의 묘지가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있다.



민영환과 이범진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고종의 측근으로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특파된 것만 비슷한 게 아니다.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자결했다. 이범진은 경술국치 이후 자결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민영환과 이범진은 자신들의 삶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자결이란 행위를 통해서다. 아관파천 당시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거부하자) 책략이 외세 의존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점에서 100년이 지난 오늘 그들의 삶이 재평가되고 있다.



‘대한제국기 북방외교’의 주역으로 새로운 평가를 받는 이범진은 고종 황제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자신의 장남 이기종에게 영어로 유서를 남겼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우리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응징할 수도 없어 절망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결로써 목숨을 끊을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범진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에 위치한 우스벤스키 공동묘역에 안치되었다. 2002년 7월 대한민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범진 공사 순국비를 세웠다. 순국비 비문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한국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



이위종









이위종



1907년 고종 황제는 일본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규탄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은밀히 파견한다. ‘헤이그 밀사’로 불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들이다. 이위종(1887~?)은 이범진의 둘째 아들이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위종은 특사단의 대변인 겸 통역관을 맡았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조차 못하게 되자 각국 기자단에게 유창한 불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 이위종이다.



이위종은 어려서부터 외교관이던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에서 살았다. 1896년 부친이 주미 공사로 임명되자 워싱턴에 갔고, 1899년 부친이 주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자 파리로 갔으며, 1901년 부친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공사로 임명되자 아버지 밑에서 참사관을 지낸다. 미국에선 중등교육을, 프랑스에선 초등 군사훈련을 받았고, 러시아 사관학교에서 장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부친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했다. 1908년엔 부친 이범진이 제공한 군자금을 지참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이범윤·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조직 동의회(同義會)를 만드는 데 참여했고, 두만강 일대에서 항일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부친의 자결 이후 이위종은 러시아군에 소속돼 있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군에서 장교로까지 활동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위종이 러시아 여인과 결혼해 낳은 후손이 현재 러시아에 살고 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율리아 피스쿨로바 박사가 이위종 열사의 외증손녀다. 지난 8월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열린 ‘이범진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가한 피스쿨로바 박사는 “나의 조상인 이범진-이위종 부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위기에 처했던 한국을 향한 애국심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태준









이태준



월북 작가인 이태준(1904~?)도 194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월북 직후인 46월 8월 ‘사회주의 모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찾은 그는 『소련 기행』이란 기록을 남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태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46년 9월 25일이었다. 이태준이 본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레닌그라드였다. 같은 도시를 가리키지만 이름이 다르다. 본래 표트르 대제의 도시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 혁명 이후 혁명가 레닌을 기념해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 이태준이 본 레닌그라드는 민영환·이범진이 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모습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부르주아 반동 도시’로 격하된 상트페테르부르그, 또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 히틀러의 공습을 겪고 난 이후의 모습을 이태준은 보았다.



레닌그라드라는 도시명은 소련 해체 직전인 91년 6월 시민들의 투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바뀌었다.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21세기의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태준이 보았던 도시와 또 다르다.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소비에트 소련의 레닌은 모두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가 문화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네바 강변 네프스키 대로는 세계적 예술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황제가 살던 에르미타주 궁전은 세계3대 박물관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고골리 등 세계적 작가들의 행적이 곳곳에서 숨쉬고 있다.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쇼스타고비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무대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과 5000여㎞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우리 근·현대사에 비춰볼 때 결코 먼 도시가 아니다. 2011년 3월 21일 송영길 인천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론슈타트 해군사관학교 인근 거리에 ‘인천 광장’이 조성됐다.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해군 바랴크함의 깃발을 인천시가 지난해 11월 러시아 측에 임대해준 데 대한 답례로 마련됐다. 송 시장도 “인천시 중구 연안부두 해양광장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으로 새롭게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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