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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18> 강원도 화천 트레일

중앙일보 2011.09.16 04:00 Week& 4면 지면보기
길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자전거 타고 전국을 유랑한 어느 레이서의 글을 읽고 나서다. 자전거 레이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길의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김훈, 『자전거여행』, 230~231쪽)


왼쪽이나 오른쪽, 물은 항상 길 옆에 있구나

강원도 화천(華川)에 가 길을 걸었다. 화천에는 물이 많아 걸을 만한 길은 어떻게든 물과 상관 있었다. 화천에서 크게 두 개의 길을 걸었는데, 하나의 길은 물을 옆에 끼고 걷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작은 물을 따라 큰물에 임할 때까지 걷는 길이었다. 두 길이 품은 물은 본래 하나였지만 각자의 길 옆에서 물은 다른 표정이었고, 그래서 길도 물을 따라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훈의 말마따나 길은 정확히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어느 표정에 발을 디딜지는, 그러니까 전적으로 당신의 표정에 달린 문제였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강원도 화천의 새로운 관광명소 ‘폰툰다리’ 모습. 북한강을 따라 1㎞ 정도 나 있다.







# 관광에 의한, 관광을 위한 길



강원도가 관광 활성화를 위해 한창 조성하고 있는 트레일이 있다. 이름하여 산소길. 모두 335억원을 들여 73개 구간 786㎞ 트레일을 닦고 있다. 북한강 상류에 자리 잡은 화천 땅에도 산소길이라고 이름 붙은 길이 세 개 있다. 그중에서 ‘파로호 100리길’이라는 구간이 시방 정비가 가장 잘 돼 있다. 파로호 100리길 중에서도 화천군이 화천 읍내를 휘감고 도는 북한강을 따라 낸 42㎞ 길이의 자전거도로가 있는데, 이 자전거 도로 안에 최근 신흥 도보여행 명소로 뜬 구간이 있다. 이른바 ‘폰툰다리∼꺼먹다리’ 구간으로 약 8㎞ 길이다.









꺼먹다리 모습. 반 세기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다.









꺼먹다리는 나무 다리다. 아직도 튼튼하다.





이 구간은 폰툰다리에서 시작해 꺼먹다리까지 가 다리를 건넌 뒤 다시 길을 내려와 폰툰다리에서 끝난다. 북한강 상류를 옆에 끼고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화천 주민의 조깅 코스이자 자전거 도로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길이어서 안전하고 평탄하다. 대신 흙을 밟는 재미는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이 길은 경관이 빼어나다. 우선 국내 유일의 폰툰다리(왕복 약 2㎞)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폰툰다리는 강 위에 부교를 띄운, 소위 수상 길이다. 폰툰(바닥이 평평한 배) 위에 나무를 깐 다음 서로 엮어 놓아 물 위에 떠 있어도 끄떡없다. 대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미한 울림이 있어 물 위를 걷는 느낌이 발바닥부터 올라온다. 올봄부터 폰툰다리가 알려지면서 주말이면 관광객이 줄을 서 다리를 걷는다. 화천군 입장에서는 새로운 관광명소를 발명한 셈이다.



 꺼먹다리는 내력이 흥미롭다. 1945년 화천댐 준공과 함께 처음 세웠다는데, 일제가 다리 기초를 놓았고 소련과 북한이 교각을 세웠고 한국전쟁 이후 화천군이 상판을 놓아 다리가 완성됐다. 말하자면 4개국 합작품인 셈이다. 요즘은 흔치 않은 나무 다리인 데다 시커매서 묘한 분위기가 인다.



 화천은 물안개로 유명한 마을이다. 요즘처럼 철이 바뀌는 무렵이면 사진작가들이 이른 아침부터 강변에 나와 진을 치고 있다. 그러나 화천은 이름처럼 물이 빛나는 마을이다. 강물에 내려앉은 햇볕이 반사되어 분산되는 시간, 화천은 마을 전체가 조명을 받은 듯 환해진다. 그리하여 화천의 강변 트레일은 환하게 웃는 길이다.



# 길의 소명을 다하다









비수구미 마을 내려가는 길. 깊은 산속을 혼자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본래 길은 마을에서 시작하고 마을에서 끝난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이을 때 비로소 길은 제 소명을 다한다. 세상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길도 덩달아 복잡해졌다. 마을 하나만을 향하여 난 길은 이제 걷기 힘들어졌다.



 화천 북쪽 파로호 상류 지역에 ‘비수구미’라는 이름의 오지 마을이 있다. 흔히 국내 3대 오지 마을로 통하는 곳인데, 앞에는 파로호 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는 해산 산줄기가 버티고 서 있어 찾아서 들어가기도 힘든 마을이다.



 이 마을을 가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배를 타고 파로호를 건너거나 마을까지 이어진 산길 6㎞를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두어 시간 걸어 내려가면 검푸른 파로호 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예서 끝나지만 대신 마을이 시작한다. 파로호 물가에 띄엄띄엄 들어앉은 세 가구. 비수구미 마을의 전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수구미는 씨알 굵은 붕어가 잘 올라오는 낚시터로 유명했다. 지금은 오지 마을 트레킹 명소로 더 유명하다. 자동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라는 조건이 외려 호기심 많은 여행자를 불러모았다.



 비수구미 마을 트레킹은 해산터널 지나 해산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는 일로 시작한다. 전망대 건너편에 ‘출입금지’ 경고문이 적혀 있고, 자물쇠 걸어놓은 철문이 버티고 서 있다. 굳게 잠긴 이 철문이 트레킹 기점이다. 비수구미 마을 이장 장윤일(69)씨에게 미리 연락해놓으면 자물쇠를 풀어준다. 마을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에서 취사나 야영 같은 행위만 하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



 비수구미 마을 가는 길은 호젓하다 못해 낭만적이다. 나란히 걷는 동행 말고 사람은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고, 온갖 야생화가 길섶에서 흔들리는데, 길은 진즉 나비·잠자리·메뚜기가 점령한 상태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아 계곡 물소리만 도드라진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한데 심심하지는 않다. 비수구미 마을 가는 길은, 부드러운 미소 머금는 길이다.



 마을에 내려와서는 꼭 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이장 집에서 청국장에다 산나물 반찬을 내놓는데 맛이 참 달다. 마을에서 나갈 때는 이장네 막내아들 만동(34)씨가 운전하는 모터보트를 타면 된다. 마을을 나가는 방법도 낭만적이다.







●길 정보













춘천고속도로 개통으로 화천 가는 길이 편해졌다. 춘천IC에서 빠져나와 46번 국도와 461번 지방도로 등을 타고 가면 서울시청에서 화천군청까지 137㎞밖에 안 된다. 화천 산소길은 아직 조성 중인 구간이 많아 이정표가 드물다. 그러나 화천군 관광지도 한 장만 구하면 그리 어려울 게 없다. 북한강변만 따라서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화천군(ihc.go.kr) 033-442-1211, 화천관광안내소 033-440-2836. 비수구미 마을에 들어가려면 이장 장윤일씨에게 연락해야 한다. 033-442-0145. 이장 집 산채백반 7000원. 모터보트 편도 운행비 3000원. 걷기여행 전문여행사 승우여행사(www.swtour.co.kr)가 10월 주말마다 비수구미 마을 트레킹 상품을 운영한다. 4만5000원. 02-720-8311.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화천 트레일’ 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 프로스펙스 홈페이지(www.prospec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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