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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사신

중앙일보 2011.09.16 00:12 종합 29면 지면보기








숙종은 재위 43년(1717) 7월 집권 노론(老論)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李<9824>命)과 독대(獨對)했다. 승지 남도규(南道揆)와 사관(史官) 권적이 입시하려 하자 환관이 막았다.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독대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하늘을 대신하는 정사를 공개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사상이었다.



 독대 후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少論)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건창(李建昌)이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노론이)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세자의 꼬투리를 잡아 실각시키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영조)으로 대체하려는 밀약(密約)이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와병(臥病) 중이었던 82세의 소론 영수 윤지완(尹趾完)은 관(棺)을 지고 상경해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써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 28일)”라고 비난했다. 대신은 국가의 신하이지 임금 개인의 사신(私臣)이 아니라는 항의였다. 수많은 신하의 피를 손에 묻혔던 숙종을 직접 꾸짖은 선비의 의기였다.



 『후한서(後漢書)』 ‘임연(任延)열전’은 임연이 황제에게 “신이 듣건대 충신은 개인을 섬기지 않고, 사신은 불충한 것입니다(忠臣不私,私臣不忠)”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 대목의 사(私)자가 화(和)자로 되어 있다. 즉 “충신은 임금과 잘 지내지 못하고, 임금과 잘 지내는 신하는 불충한 것입니다〔忠臣不和,和臣不忠)”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임금에게 쓴 소리 하는 신하가 충신이고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신하는 사신(私臣)이나 화신(和臣)이라는 비판이다.



 『맹자』 ‘양혜왕(梁惠王)’조는 맹자가 ‘제(齊) 선왕(宣王)에게 국왕 혼자 또는 소수 측근들만 즐기기보다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음악이 좋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권했다고 전한다. 『주역(周易)』 ‘계사(繫辭)’에는 “성인(聖人)은 길흉(吉凶)을 백성들과 함께 근심한다”는 ‘여민동환(與民同患)’도 나온다.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 사신(私臣), 화신(和臣)들의 리그인 장관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다. 청문회는 더 이상 화제에 오르지도 않는다. 그만큼 민심은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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