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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암보다 무서운 ‘막장드라마’

중앙일보 2011.09.16 00:10 종합 29면 지면보기






양선희
온라인 편집국장




언제부턴가 정부는 ‘동네북’이다. 정부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해당사자들이 ‘배 째라’ 하며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물론 애교로 봐줄 만한 것도, 오죽하면 저러랴 싶은 것도 있다. 한데 이젠 도가 지나쳐 환자의 생명을 인질로 잡고 정부를 압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것도 순천향대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고려대 안암병원 같은 국내 굴지의 대형병원과 일본계 대기업의 한국자회사인 올림푸스한국의 공동 연출로 말이다.



 지난주, 안철수·곽노현 등의 큰 뉴스에 가려지긴 했지만 이들이 연출한 ‘리얼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 한 편이 일각에선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주된 스토리는 대명천지의 대한민국에서 수술칼을 못 구해 조기 위암환자가 내시경수술을 받지 못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다. 이를 보도 과정을 중심으로 일별로 간략하게 짚어보면 이렇다.



 6일, 일부 대형병원이 조기 위암을 내시경으로 절제하는 수술인 ‘내시경점막하 박리절제술(ESD)’의 중단을 통보했다는 사실이 처음 보도됐다. 이달부터 이 수술이 건강보험 비급여에서 급여로 바뀐 것이 발단이 됐다. 이 때문에 250만~300만원 하던 수술이 50만원 선으로 책정되자 의료계가 “칼값도 안 나온다”고 반발하며 수술중단을 통보한 것이다. 또 이 칼을 거의 독점 공급하는 올림푸스한국은 13만원에 수입해 40만원에 파는 1회용 칼값이 9만여원에 책정돼 공급할 수 없다며 지난달 말 공급중단을 통보했다.



 7일, 환자단체연합회가 ESD수술의 신속 재개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 수술은 2008년 5월 보건복지부가 조건부 비급여를 결정하며, ‘2년간 시술의 적응증별 유효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그에 따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데 관련 학회는 연구결과를 내놓지 않았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외국 사례 등을 검토해 1년여 늦게 이번 급여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올림푸스사는 칼값 산정에 필요한 원가자료를 내라는 보건복지부의 요청을 무시했다.



 8일, 보건복지부가 칼 가격을 올려줄 수 있다며 물러섰다. ‘온라인 중앙일보(joongang.co.kr)’를 비롯해 일부 매체가 올림푸스사와 병원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9일, 올림푸스한국이 수술용 칼을 공급하기로 했고, 병원들도 추석연휴가 끝나면 수술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14일, 취재해 보니 이 수술 관련 논란은 일단 수그러든 상태였다.



 그간의 취재를 종합해 보면 이번 사태에서 책임이 가장 적은 쪽은 정부였다. 정부는 절차에 따라 수년간 일을 진행했고, 이해당사자들도 이를 알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료계와 회사 측이 정부의 자료요청에 제대로 응했거나 협상노력을 다했다는 정황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곤 정책 시행과 함께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막장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설정을 실연한 것이다. 대형병원과 외국계 대기업은 이 드라마에서 ‘협상과 타협’이라는 시장의 기술은 팽개쳐 두고, ‘대립’이라는 원시적 기법으로 막장을 향해 달려가는 광경을 연출했다.



 본인이, 혹은 가족 중에 수술해야 하는 병명을 받아 든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런 상황 자체가 얼마나 막막하고 공포스러운지. 물론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다. 올림푸스사뿐 아니라 병원도 기업활동을 하므로 이윤추구 자체를 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정상적인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은 자신뿐 아니라 소비자의 이익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목숨과 공포를 담보로 ‘수술칼’을 들고 위협하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건, 기업의 정당한 이윤추구 활동으로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정부의 실정을 탓하면 통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국민들도 안다. 그것이 정부의 잘못 때문인지, 이해관계자들의 집단이기주의와 이해타산 때문인지 말이다. 어쨌든 이번 일이 잘 끝나서 다행스럽긴 하다.



양선희 온라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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