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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후배들 눈치만” “비용절감 안 돼” 노사 외면

중앙일보 2011.09.15 00:06 경제 4면 지면보기
“지금의 임금피크제는 없는 편이 낫다. 차라리 원래 정년을 그대로 지켜줬으면 좋겠다.”(A은행 노조지부장)


금융권 8년 실험 실패

 “임금피크제를 통한 인건비 절감 효과 거의 없다. 없애는 게 노사 모두에 이익이다.”(A은행 고위 임원)



 노사 간 윈-윈 전략이 될 것이란 기대를 모았던 금융권의 임금피크제가 찬밥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2003년 6월 신용보증기금을 시작으로 금융권에 도입된 지 8년 만이다.













 현재 임금피크제를 시행 중인 금융회사는 국민·우리은행 등 시중은행 7곳과 신보를 비롯한 공기업 6곳이다. 이 중 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 도입 3년 만인 지난 1월 사측이 노조에 임금피크제 폐지를 통보했다. 2005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수출입은행도 조만간 임금피크제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출입은행 노조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정년만 늦출 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오는 16일 노사협의 때 사측에 재검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피크제는 그간 노사 양쪽을 만족시킬 해법으로 여겨져 왔다. 은행들은 인건비를 절약하고 잇따른 구조조정으로 힘겨웠던 고령 근로자들은 임금을 당장은 조금 덜 받는 대신 더 오래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강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 시중은행에서 임금피크제를 통해 2년간 근무하던 유모(57)씨는 지난해 결국 명예퇴직을 택했다. 그는 “지금의 임금피크제는 겉으로만 그럴듯한 제도”라고 잘라 말했다. “예전에는 능력만 된다면 58세 정년까지 마치고 후배들에게 멋지게 ‘안녕’할 수 있었다”며 “그런데 임금피크제 시행 후엔 회사 동료나 사측의 눈치를 보는 시간만 늘어나고 정년도 되레 몇 년 앞당겨지기 일쑤”라고 말했다.



 임금피크제로 늘어난 2년의 정년을 채워 60세까지 다닌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국민은행의 경우 2008년 임금피크제로 전환한 165명 중 현재 회사에 남아 있는 인원은 20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정년 연장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우리은행 역시 임금피크제로 연장된 정년을 채운 직원 수가 15명에 그친다.



 은행 입장에서도 임금피크제는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한 시중은행 인사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로 전환돼도 개인에게 들어가는 각종 지원금은 똑같다”며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 보면 임금 절감 효과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는 이유도 주로 자녀 학자금 등의 혜택을 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시중은행에서 3년 동안 임금피크제를 적용 받다 지난해 그만둔 김모(57)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지난해 둘째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 회사를 바로 그만뒀다. 그는 “온갖 혜택을 누리고도 왜 나가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남아 있느냐는 후배들의 시선을 참으며 버틴 게 용할 정도”라고 털어놨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에게 맡길 만한 업무도 마땅찮다. 시중은행 임원은 “지점장까지 지낸 직원에게 채권 추심이나 민원 상담 등 후선 업무를 맡기게 되는데, 당사자들의 업무 의욕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물론 후배들도 불편해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금융권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는 뿌리내리기 어려운 제도라고 지적한다. 한국경제연구원 변양규 박사는 “연공서열식 급여체계가 주를 이루는 우리 금융권 입장에선 임금피크제 실시에 무리가 있다”며 “금융권의 경우 임금이 높고 훨씬 경직적이기 때문에 도입이 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질적으로 노사가 혜택을 보려면 성과주의적 임금체계로 바꾸거나 퇴직 후 재고용하는 형태로 바꿔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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