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4) 몰락한 황류솽

중앙일보 2011.09.14 09:41


▲황류솽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무성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그다드의 도적’에 함께 출연했다. 오른쪽은 이들을 취재하러 할리우드에 온 상하이 양우화보(良友畵報) 기자 우렌더(伍聯德). 1927년 7월 양우화보 제17기(期) 17쪽.  [김명호 제공]

몰락한 황류솽 “고독이 엄습했다, 사방엔 이방인들뿐”



1943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은 미국 영화계 인사들을 초청했다. 타임(TIME)과 라이프(LIFE)지의 설립자 헨리 루스의 부탁을 받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행사를 주관했다.



산둥(山東)성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헨리 루스는 부모들 때부터 쑹메이링의 집안과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앰배서더 호텔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쑹메이링이 정좌하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부인이 의자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부인이며 무성영화 시대의 명배우였던 메리 픽포드를 필두로 로버트 테일러, 험프리 보가트, 밥 호프, 게리 쿠퍼, 타이론 파워, 헨리 폰다 등 남자 배우와 캐서린 헵번, 잉그리드 버그먼, 셜리 템플 등 여배우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황류솽(黃柳霜·황유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전용기와 전용열차로 미국 전역을 누비던 쑹메이링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상대로 명연기를 펼쳤다. 겸손과 도도함이 뒤엉킨 묘한 자태로 이들을 압도했다.



중국 퍼스트 레이디의 고급영어와 교양에 취한 참석자들은 황류솽의 불참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쑹메이링이 부르지 말라고 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쑹메이링이 황류솽을 초청자 명단에서 뺀 이유는 간단했다. “미모를 무슨 통행증 정도로 생각하는 연예인들이 해외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위험하다. 황류솽은 세탁소와 싸구려 음식점 안주인, 폭력배와 건달들의 노리갯감인 구시대의 중국인을 대표한다. 중국에는 좋은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많다. 그들의 형상이 신중국을 대표해야 한다.” 이틀 후 할리우드의 노천광장에서 쑹메이링의 강연회가 열렸다. 3만 관중이 운집했다.



쑹메이링의 할리우드 방문을 계기로 황류솽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든 사람들이 나만 떠받드는 줄 알았다. 고독이 엄습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모두 이방인들뿐이었다.” 그간 출연했던 50여 편의 영화와 167편의 무대극은 신기루와 다를 게 없었다.



영화 ‘대지’의 주인공에서 탈락했을 때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황류솽은 할리우드를 떠났다. 중국 양생(養生)미용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미용학원을 차렸다. 손님들에게 금붕어를 기르라고 권했다. “중국인들이 세숫대야에 금붕어를 놓고 들여다 보는 것을 외국인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웃는다. 안구운동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안경 쓴 애들이 드물다.”



황류솽은 평생 결혼이라는 것도 해보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는 두 부류의 중국인들이 있었다. 차이나타운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중국인 특유의 미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이고 문화 수준이 낮았다. 황류솽 같은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대단한 모험으로 간주했다. 전문 업종에 종사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린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장난만 치려고 들었다.



황류솽은 백인들 중에서 신랑감을 찾았다. 아버지 나이 뻘인 영화제작자와 눈이 맞았다. 알고 보니 유명한 플레이보이였다. 여자친구가 50명도 넘었다. 그래도 황류솽은 포기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법률에 “백인은 중국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별 거지 같은 조항이 있을 때였다. 멕시코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조르자 남자가 증발해 버렸다. 무슨 놈의 팔자가 영화 속의 배역과 비슷했다.



황류솽 사망 40년이 지나서야 중국 출신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김명호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