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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01) 충무로의 여걸

중앙일보 2011.09.14 00:25 종합 24면 지면보기



‘결말 바꿔라’ 당국 요구에, 상영포기로 맞선 전옥숙



신성일·전지연 주연의 영화 ‘휴일’(1968). 돈 없는 청년 허욱(신성일)이 길거리에서 가난한 노파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1960년 한국 젊은이의 절망을 담았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됐다. [중앙포토]





1968년 제작돼 운명이 엇갈린 사회고발성 영화 두 편이 있다. 이어령 원작의 ‘장군의 수염’은 문예영화란 점을 앞세워 검열의 칼날을 피해갔지만 이만희 연출, 전옥숙 제작의 ‘휴일’은 그렇지 못했다. 암울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돼 필름 존재조차 찾을 길이 없다가 2005년에야 발견된 불행한 영화였다.



 내가 주연한 이 영화를 복구한 CD로 수십 년 만에 보았을 때, 가슴이 저렸다. 잃었던 자식을 찾은 기분도 있었지만 작품 자체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다. 60년대 젊은이의 절망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휴일’은 어느 일요일,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겉이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담배를 산다고 내린 후 도망가버린다. 그 남자는 돈과 직장이 없는 허욱(신성일)이다.



 그는 곧이어 연인 지연(전지연)과 만나지만 다방에 들어갈 처지도 못 된다. 길거리를 걷고, 벤치에 않아 대화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바람 부는 소리가 화면을 을씨년스럽게 할퀸다. 지연은 “결혼식은 교회당에서 할까요? 드레스는 뭘로 할까요. 집은 빨간 벽돌집, 마당에는 꽃을 심어야죠”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허욱은 지연의 임신중절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괴로움 때문에 “난 바보다…”라고 중얼거린다. 지연은 “이유가 있다면 다 같이 빈털터리인 것뿐이에요”라고 그를 위로한다.



 허욱은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임신중절 비용을 구하러 다닌다. 첫 번째 친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채 “취하려고 술 마시지만 취하지 않아.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지”라며 미친 듯이 웃어댄다. 자학의 절정이다. 두 번째 친구는 돈이 넘치지만 그를 외면한다. 허욱이 돈을 훔쳐가자, 그는 “잘 됐군. 심심한데 그 녀석이나 잡으러 가야겠다”며 뒤를 쫓는다.



 그 사이에 지연은 수술을 받다가 죽는다. 공사장에서 실컷 얻어맞던 허욱은 “날 더 때려, 날 죽여”라고 외치며 자학한다. 허욱에겐 죽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휴일’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면서도 다 보고 나면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 무거운 스토리는 이만희 감독, 전옥숙 여사, 이 감독의 단짝인 작가 백결의 합작품으로 생각된다. 이 감독과 ‘만추’(1966) ‘원점’(1967)을 함께한 나 역시 그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듯 연기했다.



 당시 연합영화사 대표였던 전 여사는 사회주의적 시각을 가진 여걸이었다.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영화사 대표 중 홍일점이며, 통영 출신의 미인으로도 유명했다. 해방 후 여고시절, 좌익 활동에 관계했고, 일본 후지TV 서울 지국장을 지내며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캄보디아에 한국인으로 처음 입국해 총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면, 웬만한 남자들도 꼼짝하지 못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표현해선 안 된다’ ‘미풍양속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검열 기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이 보통 배짱인가. 나의 어머니와 형제 같이 지내온 전 여사는 영화감독 홍상수의 어머니다.



 ‘휴일’의 운명은 뻔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했다. 당국은 “주인공이 취직하거나 군에 가는 결말을 내라”고 요구했지만 전 여사는 이를 거부하고 ‘상영포기’를 선택했다. 영화 ‘휴일’의 장렬한 최후였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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