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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출가·창극 묘한 만남,국창 안숙선, 명불허전 존재감

중앙선데이 2011.09.10 23:34 235호 5면 지면보기
국립창극단의 ‘수궁가’는 독일인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77)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력을 빼놓고서 이 작품의 설명은 어려웠다. 그만큼 그의 해석과 창조성에 온전히 의존한 측면이 강했다.독일 오페라 연출의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회화를 전공한 무대 디자이너 겸 연출가다. 서사극을 주창한 브레히트의 제자인 점은 작품의 내적인 경향을 함축한다. 그는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7) 초연 연출자다. 부인이 한국인이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다고 한다. 이런 여러 인자들이 녹아 하나를 이룬 것이 ‘수궁가’다.

국립창극단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 9월 8~11일 국립극장

우선 화가 출신 무대디자이너로서의 그의 이력은 ‘수궁가’의 무대와 의상, 소품 디자인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무대가 열리면 ‘수궁가’는 한 편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굵은 붓으로 힘차게 휘갈긴 먹선이 인상적인 배경막은 동양적인 정서를 자극했다. 조명과 영상의 변화에 따라 이 막은 때론 토끼와 자라가 노는 산수가 됐다가 용왕을 찾아가는 바다도 됐다. 종이옷의 질감을 살린 각종 동물 마스크와 의상도 대담한 먹선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시각적 호사스러움과 창의성은 한국의 무대, 특히 전통에 속박돼 창조적인 일탈에 소극적인 창극 무대로서는 획기적인 면이었다.

프라이어는 한국의 유명한 전통 이야기를 현대화하는 방식에서도 독특한 해석을 시도했다. 여기서는 스승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거리 두기’(소외 효과)를 통한 풍자로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를 오늘의 상황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다분히 목적론적인 이런 방법을 활용해 그는 관객의 이성적인 자각과 교감을 이끌어냈다. 수시로 반응하는 관객들의 추임새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암시했다.

토끼에 대한 해석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판소리 ‘수궁가’에서 출세에 눈이 먼 주인공 토끼는 자라의 꾐에 빠져 용궁으로 가는 영악한 존재다. 토끼는 죽음 직전,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로 용왕을 속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프라이어는 토끼에 관한 이런 전통적인 관점을 뒤집어 ‘한국적인 영웅’으로 부각했다. 돈과 명예, 권력 등이 난무하는 복마전 같은 현실 세계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영웅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계도 있었다. 한 편의 공연이 시각적인 즐거움과 인물 해석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화려하고 대담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강점 때문인지 각각의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방대한 드라마로 엮어내는 힘은 약했다.소리꾼 한 사람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판소리를 굳이 ‘창극’이라는 드라마로 풀어서 보여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개성을 살려 극성을 풍부하게 살리기 위해서다.

프라이어는 의인화한 동물 캐릭터를 배우의 민낯 대신 마스크를 씌워 표현했다. 막을 여는 개구리를 비롯해 토끼·자라·여우·호랑이·원숭이 등 구분이 쉬운 것도 있었고 어느 것은 추상적이었다. 캐릭터를 살리는 실감나는 시도였으나 기대만큼 특징들을 살려내진 못했다. 또한 일인 다역이라는 평면적인 전개는 긴장감의 저하로 이어졌다. 얼굴은 물론 몸 전체를 의상으로 가리다 보니 배우들의 ‘발림’(연기)이 드러나지 않은 탓도 컸다.

프라이어는 12월 독일 부퍼탈 국제무대 데뷔를 대비해 ‘창극’ 대신 ‘판소리 오페라’로 명명했다고 한다. 창극이 오페라로 바뀌었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연출자의 독무대에서도 명불허전의 ‘미친 존재감’은 ‘수궁가’의 백미였다. 국창 안숙선. 작품의 ‘초앞’(시작)과 끝을 맺고, 수시로 장면 해설을 맡은 ‘도창’(내레이터)의 안숙선은 앙상블 연기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불급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초앞 여닫이막이 양 옆으로 열리면 푸른 치마를 길에 늘어뜨리고 3m 높이의 의자에 서 있는 안숙선이 등장한다. 높이를 뛰어넘는 카리스마와 절창, 이 한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본전은 한 셈이다. 프라이어도 그를 ‘마담 판소리’로 치하했다. 사상 첫 외국 연출가의 창극 도전은 그 자체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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