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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넘게 사진 찍어도 제지 안해 … ‘커닝’에 관대해진 IT 기업들

중앙일보 2011.09.06 00:08 경제 2면 지면보기



디자인·기술 꽁꽁 싸매던 시절은 안녕
경쟁 제품 연구해야 시장 흐름 안 놓쳐
노출 꺼리던 일본, 시장서 고전 ‘교훈’도
제소해도 긴 시간 걸려 “실익 없다” 판단



독일 베를린의 국제가전전시회(IFA)에서 한 방문객이 소니의 안드로이드기반 태블릿 컴퓨터인 ‘태블릿 S’를 카메라로 찍고 있다. 핵심 신제품의 경우 극구 노출을 꺼리던 과거와 달리 이번 전시회에선 참가업체들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경쟁사에도 신제품·신기술을 공개하고 있다. [블룸버그]













신제품과 관련한 정보는 어느 회사에서나 극비로 다뤄진다. 엄청난 인력과 자금을 쏟아부어 제품을 만들어도 제작 노하우나 기술이 새어나가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특히 이런 신제품 ‘과(過)보호 증후군’은 경쟁과 베끼기가 치열한 자동차·전자업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요즘 글로벌 가전업계에선 이런 상식이 깨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경쟁업체가 개발이 완료된 자사의 신제품·신기술 정보를 어느 정도 벤치마킹할 수 있도록 묵인하거나 방치하는 것이다. 신제품에 관한 비밀을 꽁꽁 숨기는 것보다 조금씩 노출시키는 게 외려 판매나 시장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변화는 독일 베를린의 국제가전전시회(IFA 2011) 전시장에서도 뚜렷했다. 3일(현지시간) 오후 IFA의 삼성전자 전시관. 관람객이 몰리는 시간대에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을 한 이들은 두 시간 넘게 수십 가지가 넘는 신제품 부스를 일일이 돌며 꼼꼼히 제품을 살폈다. 한 가지 제품을 수차례에 걸쳐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했다. 촬영 중간중간 서로 뭔가를 의논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삼성전자 관계자는 “아마 중국 가전업계 관계자들이 정보 수집차 온 것 같다”며 “요새는 구태여 막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쟁업체에 신제품이 노출되는 게 찜찜할 수 있지만, 전시장에 나올 정도의 완제품은 공개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물론 삼성·LG전자 같은 글로벌 최강 가전사들도 경쟁사 매장을 돌며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를 챙긴다. 경쟁 제품 연구를 통해 시장 흐름과 동떨어진 제품 개발을 피할 수 있어서다.



 반면에 몇몇 일본 업체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중요 신제품은 밀실에 숨겨놓고 몇몇 VIP에게만 공개할 정도로 노출을 꺼렸다가 결국 한국에 밀리게 됐다. 개방성을 중시하지 않고 자기 것만을 고집한 탓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특히 요즘처럼 다양한 스마트 가전제품을 운영하는 운영체제(OS)의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에는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진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이런 형태의 벤치마킹을 통해 후발업체들은 선두업체와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 선두업체들은 자신들의 제품 스타일을 따르는 무리를 이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전메이커 간 여전한 기술력 격차도 이 같은 ‘합법적 커닝’을 묵인해 주는 배경이 되고 있다. 실제 국내 3D TV 신제품 겉 테두리(베젤)의 두께는 5㎜ 정도지만, 이번 IFA에 제품을 내놓은 중국 업체의 것은 이보다 3~4배 이상 두꺼웠다. 마치 과거 한 통신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를 연상케 하는 노림수다.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디자인 침해를 이유로 해당 국가 법원에 제소하더라도 판결이 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소송의 실익이 적어서다.



 제품뿐 아니라 브랜드 로고 등도 베끼기 대상이 된다. 올해 IFA에 참가한 해외 가전업체 중 프랑스의 톰슨과 중국 하이센스·TCL·창훙 등의 스마트 TV 로고는 삼성전자의 것과 유사했다. 국내 가전업체들의 전시장 배치를 흉내 낸 곳도 많았다.



 삼성전자 안윤수 상무는 “TV만 봐도 신제품 디자인이 나온 지 길어야 6개월 뒤면 비슷한 형태의 경쟁 제품이 나온다”며 “그만큼 제조업체들 사이에선 제품 라이선싱이나 특허 등이 확실히 보호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베를린=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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