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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잃고 수만 명 아들 얻은 어머니”

중앙일보 2011.09.05 00:48 종합 20면 지면보기



‘노동운동 대모’ 40년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별세
7일 영결식 … 모란공원 안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부부가 3일 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영정사진 속에서 고(故) 이소선(81) 여사는 손에 마이크를 쥔 채 연설을 하고 있었다. 유족들은 “거리에서 싸우던 어머님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3일 지병으로 별세한 이 여사는 1970년 아들 전태일(사망 당시 22세)의 분신을 계기로 40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해온 ‘한국 노동운동의 대모’였다. 3일과 4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만난 딸 전순옥(57)씨와 장기표(66) 전태일재단 이사장, 배우 홍경인(35)씨에게 생전의 이 여사에 대해 물었다.









전순옥
전태일 여동생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전순옥씨는 “어머니는 내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노동운동가의 이미지다. 이 여사는 정씨에게 “근로기준법 준수와 정규직 채용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못 지킬 바엔 문을 닫아라”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기업 운영을 할 때도 ‘사회’보다 ‘기업’이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또 다른 면은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전씨는 “어머니는 누구를 만나든 항상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전씨는 “70~80년대 경찰 조사를 받을 때면 ‘존경하는 인물’을 쓰는 칸에 항상 ‘어머니’라고 썼다”며 “어머니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




 ◆“아들 잃었지만 수천·수만의 새 아들 얻어”=장기표 이사장은 “이 여사는 아들 하나를 잃었지만 수천·수만의 새 아들을 얻은 분”이라고 했다. 장 이사장은 대학생 때 전태일의 장례식을 위해 이 여사를 처음 만났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일 때에도 이 여사의 집을 드나들었다.



77년 장 이사장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자 이 여사는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재판장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지원한 건 북한의 지령이 아니냐”고 장 이사장에게 묻자 이 여사가 “판사나 검사나 다 똑같은 놈”이라고 소리쳤다. 법원은 이 여사를 법정 구속했고 법정 모독죄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홍경인
영화 ‘전태일’ 주연




 ◆“생전에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95년 시민들의 후원금 2억5000만원으로 제작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했다. 영화에서 전태일 역을 맡은 건 당시 19세였던 배우 홍경인(35)씨였다. 3일 빈소를 찾은 홍씨는 “배우로서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싶어 어머니께 많이 물어봤었다”고 회상했다. 홍씨는 “어머니는 전 열사와 닮았다면서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다”며 “생전에 더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 여사의 빈소에는 3일 한명숙 전 총리, 김문수 경기도지사,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이 찾아와 조문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 등이 빈소를 지켰다. 4일에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재오 특임장관,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권영길 의원, 안희정 충남도지사, 국민참여당 이재정 상임고문·유시민 대표, 이부영·이계안 전 의원,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 법륜 스님, 방송인 김제동씨가 헌화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조화를 보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장례위원회는 이번 장례를 ‘민주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7000여 명의 시민 장례위원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장례위는 오는 7일 대학로와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영결식과 노제를 치른 뒤 전태일이 묻힌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이 여사를 안장하기로 했다.



글=이한길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전태일(1948~1970)=1970년 11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평화시장 재단사. 당시 평화시장에는 2만 명의 근로자가 박봉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학생·재야 지식인들에게 고속 성장의 그늘을 알려준 계기가 됐다.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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