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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96) 엄앵란의 복귀작

중앙일보 2011.09.05 00:26 종합 26면 지면보기



“앵란아 나 좀 살려줘” 차태진의 부탁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아네모네 마담’(1968). 엄앵란(맨 오른쪽)이 결혼 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다. 엄앵란은 촬영 당시 임신 상태였다. [중앙포토]





엄앵란이 가장 어렵게 찍은 영화는 1968년작 ‘아네모네 마담’이 아닌가 한다. 64년 11월 결혼 후 엄앵란은 집안살림에 전념했다. 65년 첫딸 경아가 태어났고, 67년 초 둘째 아들 석현이가 임신됐다. 몸이 불어 영화 출연에 적합하지 않았다. 65년 상영된 엄앵란의 작품은 모두 결혼 전에 찍었던 것이다. 인심이 푸짐했던 아내는 이태원 181번 우리집을 ‘영화계의 사랑방’으로 만드는 데 만족했다.



 67년 가을 무렵 어느 날, 엄앵란은 평소처럼 수건을 쓴 채 김장용 고추꼭지를 따고 있었다.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 모습이었다. 그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의 출세작인 ‘아낌없이 주련다’를 비롯해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영화를 히트시킨 극동흥업 차태진 사장이었다. 극동흥업은 신성일·엄앵란표 청춘영화의 산실이었고, 차 사장은 우리를 굉장히 귀여워해주었다. 엄앵란과 극동흥업의 전속인 김기덕 감독을 결혼시키려 하기도 하고, 나와 엄앵란이 결혼할 때 함께 작전을 짠 사람도 그였다. 우리에겐 가족 같은 분이었다.



 아내로부터 들은 그날 상황은 이랬다. 차 사장은 고추꼭지를 따고 있는 엄앵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앵란아, 나 좀 살려줘라. 네가 집으로 들어가고 난 후, 난 망해버렸다. 우리 영화에 출연해줘.”



 엄앵란은 깜짝 놀랐다. 임신 5개월인데다, 스크린을 떠난 지 3년이나 된 주부에게 주연 제안이라니. 그녀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차 사장님, 저 74㎏이에요. 상품가치가 있겠어요?”



 극동흥업은 엄앵란이 떠난 후 다소 고전했다. 차 사장은 햇빛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고추 사이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간곡하게 매달리는 통에 엄앵란은 결국 그 자리에서 출연을 약속했다. 상대가 차 사장이었던 만큼,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열정적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 작품이 나와 엄앵란 주연의 ‘아네모네 마담’이다. ‘아네모네’ 다방마담과 젊은 청년의 사랑 이야기였다. 엄앵란이 결혼 후 촬영한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엄앵란이 60년대 트로이카(문희·남정임·윤정희)와 함께한 ‘결혼교실’(1970)의 경우 라스트 신에서 무스탕을 타고 나타나는 특별출연에 불과했다.



 엄앵란의 복귀작인 ‘아네모네 마담’은 그녀에 대한 극동흥업의 애정 표시라 할 수 있다. 당시 여배우의 결혼은 은퇴를 뜻했다. 엄앵란이란 배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향수라 할까. 참 고마운 회사였다.



 내가 남자주인공을 맡기는 거북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다른 배우가 엄앵란을 상대해주기를 바랐다. 뱃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선지 촬영 중 연애 감정이 살아나지 않았다. 엄앵란 역시 나와의 해변가 러브신이 실감나지 않았다고 했다. ‘아네모네 마담’은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차 사장은 결산 후 코로나 자동차 한 대를 보내주었다. 개런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엄앵란은 차 사장의 선물에 놀랐다. 훈훈한 마음씨였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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