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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고려양

중앙일보 2011.09.05 00:27 종합 33면 지면보기








지금으로부터 700~800여 년 전에 세계제국 원(元)나라에 한류(韓流)가 불었다. 바로 고려양(高麗樣), 또는 고려양자(高麗樣子)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元末明初) 때 인물인 권형(權衡)이 편찬한 『경신외사(庚申外史)』는 원 순제(順帝) 즉위년(1333)부터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 가는 1367년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순제가 경신년(庚申年)에 태어나 경신제(庚申帝)로 불렸기 때문에 『경신외사(庚申外史)』라고 지은 것이다.



 권형은 이 글에서 “(원나라) 대신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야 명가(名家)라고 불렸다”면서 “사방의 의복과 신발, 모자 및 기물(器物)이 모두 고려의 모습을 따랐다[高麗樣子]……이렇게 일시의 풍조에 관계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원나라에 고려양이 유행하게 된 데는 공녀(貢女) 출신 여인 기씨(奇氏)가 있었다. 『경신외사』는 태자의 모친을 ‘고려씨(高麗氏)’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가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였던 황후(皇后) 기씨였다. 고려양은 기씨가 원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으면서 생긴 풍조다.



 원나라 양윤부(楊允孚)의 『난경잡영(灤京雜詠)』에는 “고려 생채 맛을 다시 말하네(更說高麗生菜美)”라는 구절이 있다. 양윤부는 이 시 주석에서 “고려 사람들은 생채(生菜)로 밥을 싸서 먹는다”라고 덧붙였다. 육식 위주였던 원나라 사람들은 밥을 상추에 싸먹는 고려 풍습이 꽤나 이채로웠던 것이다. 또한 원나라 말기 사람인 장광필(張光弼)의 『궁중사(宮中詞)』에는 “궁중 옷차림은 새로 고려 모습을 높여서/방령(方領:저고리)은 허리까지 내려오지만 어깨는 반밖에 덮지 않네/밤마다 궁중에서 앞 다투어 구경하니/일찍이 이 옷 입고 어전에 왔기 때문일세(宮衣新尙高麗樣/方領過腰半臂裁/連夜內家爭借看/爲曾着過御前來)”라고 읊었다. 원나라 궁중의상도 고려 옷차림이 지배했음을 말해준다.



 성호 이익(李瀷)은 『생채와 괘배(生菜掛背)』라는 글에서 이 시 앞부분을 인용하면서 ‘고려시대의 옷을 원나라 사람들이 본떠 만든 것 같다’고 평했다. 그런데 문화란 서로 오고 가기 마련이어서 우리 혼인 풍습의 족두리 등은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준 고고리(古古里)가 와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몽골풍이다. 산업은행이 몽골 국책은행인 몽골개발은행의 최고경영자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몽골족과 우리는 원래 같은 동이(東夷) 계통의 같은 민족이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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