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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희소가치

중앙일보 2011.09.03 03:00 종합 31면 지면보기








2005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했다. 이틀 후 영국 런던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파커 볼스의 결혼식 기념 커피잔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 연유는 이랬다. 결혼식은 원래 8일이었다. 그런데 교황의 장례식 날짜가 그날로 잡혔다. 영국 왕실은 예식을 하루 늦췄다. 미리 출시된 기념 커피잔에 새겨진 ‘4월 8일’은 잘못된 날짜가 됐다. 그런데도 커피잔은 품절됐다. 다들 날짜가 잘못 들어간 커피잔이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희귀품으로 거래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희소가치’에 사람들이 얼마나 매달리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소위 ‘불친절 마케팅’도 알고 보면 희소성을 이용한 심리전이다. “우리는 재료 떨어지면 더 이상 음식 안 판다”며 ‘배짱 장사’를 하는 식당이 있다. 그런데도 붐빈다. 못 판다고 하면 더 사고 싶어진다. 이른바 ‘심리적 저항’을 유발하는 것이다. ‘디마케팅(demarketing)’도 그렇다. ‘굳이 우리 물건을 사지 않아도 좋다’며 오히려 소비자들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판매전략이다. “상품이 실제로 부족하지 않더라도 유통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기다림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은주, 『럭셔리 브랜드 마케팅』)



 ‘기다림의 대상’ 전략을 성공리에 구사한 사례가 세계적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이다. 에르메스는 버킨백 생산량이 극히 제한돼 있어 돈이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소위 ‘웨이팅 리스트’에 올라도 손에 가방을 쥐기까진 최소 1,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웨이팅 리스트가 있다”는 우스개도 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버킨백을 사기 위한 분투기를 『에르메스 길들이기』(2010)라는 책으로 낸 미국 작가 마이클 토넬로의 증언이다. 그에게도 버킨백은 한동안 ‘불사조나 일각수(一角獸) 같은’ 전설적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에르메스 매장에서 다른 제품을 다량 구입하자 금세 버킨백을 구할 수 있었단다. 결국 허구이고 상술이었다는 얘기다. 1일 현재 버킨백의 한국 내 구매 대기자가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희소가치를 강조하는 고도의 상술에 몸이 달아 핸드백 값 1200만원을 내고 번호표를 뽑은 사람들에겐 토넬로의 체험담은 열 받을 얘기다. 내가 ‘봉’ 됐나 싶을 테니까.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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